영화 비평

검열된 입술의 축복 — 시네마 천국

「시네마 천국」 (Nuovo Cinema Paradiso) · 주세페 토르나토레 (Giuseppe Tornatore) · 1988

시네마 천국 (1988) 이미지
「시네마 천국」 (1988) 이미지 © TMDb

1

‘시네마 천국’은 관객을 울리려고 작정한 영화다. 이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거나, 아직 이 영화를 안 본 사람이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선율이 불어닥치면 심장은 감독의 지휘봉 아래 놓이고, 스크린 위 시칠리아의 먼지 낀 햇살은 보는 이의 기억 속 어딘가를 건드린다. 영국의 한 영화 평론가이 영화를 두고 “시네필들이 팝콘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세련된 감수성을 자축하도록 너무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다”고 꼬집은 바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설계가 보인다고 감동이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왜 우리가 이토록 기꺼이 조작당하느냐는 것이다.

2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기억의 촉발이라는 익숙한 장치를 택한다. 성공한 영화감독 살바토레가 고향 소식을 전해 듣고 과거로 빠져드는 구조. 회상 속 시칠리아 소읍의 영사기사 알프레도와 꼬마 토토의 관계가 이 영화의 심장이다. 필립 누아레가 연기한 알프레도는 따뜻하되 권태롭고, 지혜롭되 자조적이다. 그는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 아버지 역할을 대행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좁은 마을에 갇혀 소모되어가는 인물이다. “떠나라, 돌아보지 마라”는 그의 충고에는 쓸쓸한 자기고백이 배어 있다. 남은 자의 후회. 머무름이 곧 쇠락(衰落)이라는 자각.

어린 토토 역의 살바토레 카시오는 연기라기보다 존재 자체로 스크린을 채운다. 영사실 안,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와 빛 속에서 경이로움에 빠져드는 그 얼굴은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라는 원초적 감각을 환기한다. 토르나토레가 영사실을 촬영하는 방식에는 확실한 애정이 있다. 관객에게 보이지 않으면서 관객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존재, 영사기사라는 직업에 대한 헌사다. 청소년기와 성인기의 서사는 이 유년기 파트에 비해 힘이 빠진다. 첫사랑 에피소드는 범용(凡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국제판이 이탈리아 원판에서 성인 살바토레의 로맨스를 대거 삭제한 것은 현명한 편집이었다. 덜어냄으로써 영화는 진짜 주제에 집중하게 된다 — 영화관이라는 공간 그 자체.

신부가 종을 흔들어 키스 장면을 검열하는 반복 모티프는 희극적이면서 시대적이다. 그리고 마지막 몽타주에서 이 모티프는 뒤집힌다. 알프레도가 평생 잘라낸 키스 장면들을 이어 붙여 토토에게 남긴 유산. 검열이 축복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잘려나간 입술들이 모이자 하나의 거대한 입맞춤이 된다. 이 장면이 ‘심금을 울린다’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대신 이렇게 말하겠다 — 이 장면 앞에서 눈물을 참는 것은 체력의 문제다.

3

영화관은 한때 마을의 광장이었다. 스크린 앞에서 관객은 함께 웃고, 함께 소리 질렀다. 지금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화면을 본다. ‘시네마 천국’이 복원하는 것은 필름의 질감이 아니라 집단적 경험이라는 것의 기억이다. 모두가 같은 빛을 바라보던 의례.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검열할 것은 넘쳐나는데, 정작 무엇이 잘려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는 사라졌다. 각자가 각자의 신부가 되어 타인의 입술에 종을 울린다. 모두가 모두를 검열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남겨질 몽타주는 과연 무엇일까. 알프레도의 유산처럼, 잘려나간 것들이 다시 모여 아름다움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누군가 내 입술을 평생 잘라내 준다면,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 ‘시네마 천국’은 그 사실을 두 시간에 걸쳐 증명한다. 조작이라고? 좋다. 기꺼이 당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