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벽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 — 핑크 플로이드 더 월
「핑크 플로이드 더 월」 (Pink Floyd: The Wall) · 앨런 파커 (Alan Parker)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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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보는 이를 거부한다. 앨런 파커의 ‘핑크 플로이드 더 월’(1982)은 95분간 관객을 환대하지 않고,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으며, 심지어 대사조차 거의 주지 않는다. 록스타 핑크의 정신 붕괴를 다룬다지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서사가 아니라 시청각적 폭격이다. 영국의 비평가 필립 스트릭이 영국의 한 영화지에서 “논의하기엔 흥미롭지만 경험하기엔 다른 문제인 영화”라고 썼을 때, 그는 이 작품의 본질적 딜레마를 정확히 짚었다. 이 영화는 관객과의 소통을 거부함으로써만 성립하는 역설적 구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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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 영화가 40년 넘게 회자되는 까닭은 제럴드 스카프의 애니메이션 시퀀스에 있다. 서로를 집어삼키는 꽃들, 행진하는 망치 군단, 항문 형상의 재판관―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은 실사 장면이 도달하지 못하는 내장(內臟)의 영역을 파고든다. ‘벽 속의 또 다른 벽돌 파트 2’에서 획일적 교육에 저항하는 아이들이 문자 그대로 산업용 분쇄기의 고깃덩이가 되는 장면. 이 시퀀스는 단순한 은유를 넘어 신체적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공교육의 억압을 ‘고기를 가는 행위’로 시각화한 것은 조야(粗野)하다 할 수 있으나, 조야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선택한 언어다. 스카프의 그림들은 논리를 비웃고 직감에 호소하며(感性直訴, 理性嘲笑), 그래서 오히려 기억에 깊이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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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실사 파트다. 밥 겔도프가 연기한 핑크는 고통받는 육체 이상의 무엇도 보여주지 않는다. LA 호텔 방에서 자해하고, 유년의 트라우마를 되새기고, 결국 네오나치 선동가로 변신하는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그는―연기라기보다 하나의 ‘상태’에 가깝다. 앨런 파커의 기술적 역량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카메라가 포착한 겔도프의 얼굴에서 우리는 어떤 내면도 읽어내지 못한다. 파시즘 집회 장면은 논쟁을 의도한 것이 분명하지만, 스트릭의 지적처럼 정치적 논평이라기보다 “청소년적 도발”에 머문다. 반복되는 주제―벽은 고립의 은유, 망치는 순응의 상징―는 95분을 채우기엔 너무 단순하다. 이 영화의 우울은 심오한 것이 아니라 집요할 뿐이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두 번 보았고, 두 번 다 중간에 멈추고 싶었다(고백하건대, 멈추지 못한 이유는 스카프의 다음 그림이 궁금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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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관객을 밀어내는 이 영화가, 수십 년간 컬트적 숭배를 받아왔다는 사실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소통 불가능성을 주제로 한 영화가 관객과 친밀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모순(自己矛盾)이 아닌가. ‘더 월’은 벽을 허물자고 외치면서 동시에 가장 견고한 벽을 쌓는다. 우리가 사는 세계도 다르지 않다. 연결의 시대라 불리는 지금,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각자의 방 안에 갇혀 있다. SNS의 담벼락은 소통의 도구인가, 아니면 자기만의 벽돌을 쌓는 행위인가. 핑크의 광기가 40년 전보다 오늘 더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이 영화는 실패함으로써 성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