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당신은 왜 남의 집 창문을 들여다보는가 — 이창
「이창」 (Rear Window) · 알프레드 히치콕 (Alfred Hitchcock) · 1954
[1] 카메라가 서서히 열린 창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한 아파트 안마당. 한여름의 열기가 사람들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발레리나처럼 몸을 풀어대는 여자, 조각가처럼 화분을 다듬는 노부부, 침대에서 뒤척이는 외로운 중년 여성. 그리고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 휠체어에 파묻힌 남자—잡지사 사진기자 제프. 그의 시선이 맞은편 아파트의 사각형 창문들을 훑는다. 마치 영화관 좌석에 앉은 관객이 스크린을 응시하듯.
[2] 이 영화는 스릴러인가? 답: 그렇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1954)은 이웃집 살인 의혹을 파헤치는 추리극이면서, 동시에 ‘왜 인간은 타인의 삶을 훔쳐보고 싶어 하는가’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영국의 한 영화 평론가이 영화를 두고 “관객을 주인공의 관음증에 공모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 행위를 비판하는 아이러니”라고 썼다. 제프가 망원렌즈로 맞은편 창문을 들여다볼 때, 관객도 제프의 시선에 올라탄다. 우리는 공범이 된다. 살인 추리의 쾌감을 즐기면서, 문득 섬뜩해진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3] 이 영화에서 제임스 스튜어트는 호감형 미국인의 전형을 연기하면서도 그 안에 불쾌한 진실을 숨겨놓는다. 제프는 세계를 누비며 전쟁터를 찍어온 사진기자지만, 정작 자기 앞의 여자—그레이스 켈리가 연기한 리사—에게는 온전히 눈을 맞추지 못한다. 그녀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결혼을 암시하면 외면하고, 그녀가 용의자의 아파트에 잠입해 목숨을 거는 순간에야 비로소 제프의 눈이 반짝인다. 그는 참여보다 관찰을 선호하고, 친밀함보다 거리 두기를 택하는 인간이다. 레이먼드 버가 연기한 살인 용의자 쏘왈드는 어떤가. 이 남자에게는 악당다운 카리스마가 없다. 땀에 젖은 셔츠, 지친 표정, 병든 아내를 돌보다 지쳐버린 평범한 중년 남성. 히치콕은 악을 특별한 곳이 아니라 이웃집 창문 너머, 우리와 똑같이 생긴 얼굴 안에 배치한다.
[4] 여기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이 영화는 70년 전 영화인가? 답: 그렇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의 영화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일 타인의 창문을 들여다본다. SNS 피드라는 이름의 사각형 창문을. 연예인의 사생활을 캐는 기사를, 이웃의 층간 소음 분쟁을 생중계하는 영상을, 정치인의 비리를 폭로하는 제보 화면을. 우리는 그것을 ‘알 권리’라고 부르거나 ‘정의 구현’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솔직해지자. 그 안에는 분명 쾌감이 있다. 타인의 추락을, 타인의 비밀을, 타인의 치부를 엿보는 은밀한 흥분. 히치콕은 7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카메라를 든 자와 스크린을 응시하는 자 사이에 도덕적 우열은 없다는 것을.
제프는 영화 말미에 쏘왈드와 마주한다. 더 이상 창문 너머 안전한 거리에 있지 않다. 관찰자가 피해자가 되는 순간이다. 우리 사회도 매일 그 순간을 맞는다. 어제의 관음자가 오늘의 피사체가 되고, 어제의 폭로자가 오늘의 폭로 대상이 된다. 결국 모두가 서로의 창문을 들여다보는 이 투명 감옥에서, 진짜 문제는 살인이 아니라 우리가 왜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느냐는 것이다. 커튼을 치는 법을 잊은 시대, 창문을 닫는 법을 잃은 사회. 히치콕의 제프는 결국 또다시 깁스를 하고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