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환영(幻影)을 파는 시대의 영웅 —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Spider-Man: Far From Home) · 존 왓츠 (Jon Watts)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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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 질렌홀은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촬영 당시 “이 영화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뭔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다고 한다. 배우 본인조차 자기 캐릭터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연기했다는 이 일화는, 그가 연기한 ‘미스테리오’라는 악당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다.
미스테리오의 정체는 특수효과 기술자다. 그는 허공에 수백 대의 드론을 띄워 홀로그램을 투사하고, 그럴듯한 괴물과 재난을 만들어내 대중을 공포에 빠뜨린 뒤 스스로 그것을 해결하는 ‘가짜 영웅’이 된다. 원작 만화에서 미스테리오가 할리우드 영화 소품담당자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설정은 CGI로 점철된 오늘날 블록버스터 영화에 대한 자기비판처럼 읽힌다. 가짜 이미지로 진짜 영웅을 만들어내는 마블 스튜디오 스스로가 미스테리오가 아닌가 하는 아이러니. 제작진이 이 역설을 의식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질렌홀은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서 춤을 춘다. 다정한 삼촌처럼 미소 짓다가 어느 순간 섬뜩하게 눈빛이 변하는 순간, 우리는 이 배우가 왜 ‘나이트크롤러’ 같은 괴작을 선택했는지 새삼 납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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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프롬 홈’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이라는 거대한 장례식을 치른 직후 내놓은 첫 작품이다. 전작에서 토니 스타크(아이언맨)가 우주를 구하고 죽었으니, 피터 파커는 자신의 멘토를 잃은 슬픔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네가 다음 아이언맨이 되어야 해”라는 세상의 기대를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트라우마를 코미디로 처리하는 묘한 선택을 한다. ‘블립(Blip)‘이라 불리는 현상―타노스가 손가락 튕겨 인류의 절반이 사라졌다가 5년 뒤 돌아온 사건―을 이 영화는 가볍게 우스갯거리로 삼는다. 농구팀 주전이 사라진 5년 동안 후보가 주전이 되었는데 원래 주전이 돌아와 자리를 빼앗겼다느니, 뭐 그런 식이다. 전 인류적 재난이 페이스북 밈 수준으로 소비된다. 나는 이 기이한 가벼움이 불편했다가, 문득 우리 시대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산다. 집단적 트라우마를 빠르게 밈으로 만들어 소비하고, 웃고, 잊는다. 슬픔을 슬픔으로 감당하기엔 세상이 너무 빠르고, 비극을 비극으로 기억하기엔 다음 비극이 너무 빨리 도착한다. 영화 속 10대들이 전 우주적 재앙을 “그거 좀 웃기지 않았어?” 하고 넘기는 모습은 기성세대의 눈에 경박(輕薄)하게 보일 수 있으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남는 유일한 전략인지도 모른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기 위해 웃는 것이다. 톰 홀랜드가 연기하는 피터 파커는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세상을 구해야 하나, 좋아하는 여자애 옆자리에 앉아야 하나.
영화는 베니스, 프라하, 런던을 돌아다닌다. 유럽의 아름다운 도시들이 배경으로 등장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 도시들은 ‘파괴되기 위해’ 존재한다. 베니스의 운하도, 프라하의 광장도, 런던의 다리도 어차피 부숴질 것이므로 장소성은 증발한다. 이건 마블만의 문제가 아니다. 요즘 블록버스터들은 세계 각지를 배경으로 삼지만, 정작 그 장소가 가진 역사나 문화는 관심 밖이다. 관광 포스터처럼 예쁜 풍경이 등장하고, 터지고, 사라진다. 마치 인스타그램 스토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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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진짜 핵심은 환영(幻影)이다. 미스테리오는 허공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 보여주고, 사람들은 그것을 진짜라고 믿는다. 영화 속 미스테리오의 명대사를 인용하자면 이렇다. “세상 사람들은 뭐든 믿고 싶어 한다. 요즘엔 특히.” 이 대사가 2019년에 나왔다는 사실이 섬뜩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지 않은가. 정치인들은 드론 대신 유튜브 알고리즘을 띄워 환영을 만든다. 없는 위기를 있는 것처럼, 있는 성과를 없는 것처럼 조작한다. 그리고 대중은 기꺼이 속는다. 아니, 속고 싶어 한다. 미스테리오가 말했듯이 “이미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사는 사람들을 속이기란 쉽다.” 우리는 내가 믿고 싶은 것을 확인시켜줄 영웅을 애타게 찾고, 그 영웅이 CGI인지 실제인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영화 중반, 피터 파커는 미스테리오가 만든 환영 속에 갇혀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허우적댄다. 기차에 치이고, 절벽에서 떨어지고, 다시 일어나 또 쓰러진다. 이 장면은 마블이 만들어낸 가장 기괴하고 창의적인 시각적 시퀀스 중 하나다. 에셔의 착시 그림과 스티브 딧코의 원작 만화가 뒤섞인 악몽. 그리고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요즘 뉴스를 읽는 내 머릿속을 떠올렸다. 무엇이 진짜 뉴스고 무엇이 가짜 뉴스인지, 무엇이 진짜 분노고 무엇이 동원된 분노인지, 구분이 점점 어려워지는 이 시대의 현기증 말이다.
영화의 미드크레딧 장면은 피터 파커의 정체가 온 세상에 폭로되는 충격적 반전으로 끝난다. 환영(幻影)의 제조자 미스테리오는 죽으면서도 마지막으로 가장 치명적인 환영을 남긴다. 진실을 조작하고, 영웅을 악당으로 둔갑시키는 환영.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우리 사회의 수많은 ‘미스테리오들’을 떠올렸다. 정보와 이미지로 진실을 왜곡(歪曲)하고, 선의를 악의로 뒤집으며, 그 와중에 자신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자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영화 하나 보고 오버한다”고 할 것이다. 맞다. 나는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면서도 늘 이런 식으로 딴생각을 한다. 직업병이다. 하지만 영화란 원래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었던가.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완벽한 영화가 아니다. 유럽 여행은 관광 카탈로그 같고, 10대 조연들은 개그 담당 이상의 존재감을 갖지 못하며, 닉 퓨리(새뮤얼 L. 잭슨)는 퉁명스럽게 대사만 전달하다 퇴장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마블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불편한 질문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만드는 이 화려한 영웅 서사는 진짜인가, 미스테리오가 만든 홀로그램 같은 것인가.
영화 말미에서 피터 파커는 자신의 감각을 믿기로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온몸이 느끼는 ‘스파이더 센스’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한다. 멋진 결말이다. 다만 현실의 우리에겐 스파이더 센스가 없다. 우리에겐 그저 피곤한 눈과,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다는 권태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가. 그것이 진짜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혹시 당신이 열광하는 그 영웅은 드론 위의 홀로그램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