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마스크는 누구의 것인가 —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Spider-Man: Into the Spider-Verse) · 밥 퍼시게티, 피터 램지, 로드니 로스먼 (Bob Persichetti, Peter Ramsey, Rodney Rothman) · 2018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2018) 이미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2018) 이미지 © TMDb

영국 한 영국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애니메이션 영화의 문법을 진짜로 진전시킨 작품”이라 썼다. 과장이 아니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슈퍼히어로 장르가 10년 넘게 시장을 포화시킨 뒤에도 ‘진정한 놀라움’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화면 한 장 한 장이 벤데이 도트로 뒤덮인 살아 있는 만화책이고, 색판이 의도적으로 어긋나 인쇄소 특유의 불완전함을 흉내 낸다. 프레임 레이트는 감정의 농도에 따라 들쭉날쭉 바뀐다. 기술적 모험 자체가 서사가 되는, 드문 경우다.

1. 움직이는 그래픽노블

감독 셋—밥 퍼시게티, 피터 램지, 로드니 로스먼—은 CG, 손그림, 그래픽노블 미학을 뒤섞어 기존 애니메이션 문법을 통째로 뒤집었다. 주인공 마일스 모랄레스가 자신의 능력을 제어하지 못할 때 선은 흐려지고 배경은 인상주의처럼 뭉개진다. 반대로 도약 본능이 작동하는 순간엔 색이 팡 터지며 판넬이 동시에 쪼개진다. 어떤 프레임을 멈춰도 갤러리에 걸 만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기술 그 자체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시각 실험 안에 감정의 뼈대를 정확히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브루클린에 사는 흑인-라틴계 10대, 마일스. 그는 명문 기숙학교에 입학하고도 스스로 시험을 망친다. 뿌리에서 분리되는 일이 두렵기 때문이다. 경찰인 아버지는 스파이더맨을 불신하고, 그래피티 아티스트 삼촌은 유혹과 함정 사이를 오간다. 거미줄 하나에 청소년기의 불안과 정체성 갈등이 한데 엉켜 있다.

2. ‘아무나’라는 급진성

필 로드가 쓴 각본의 핵심 테제는 명료하다. “누구나 마스크를 쓸 수 있다(Anyone can wear the mask).” 슈퍼히어로 장르는 전통적으로 ‘선택된 자’의 서사였다. 신의 피를 이어받았거나, 부모가 살해당했거나, 우연히 돌연변이가 되거나. 그 기원 신화는 영웅을 범접 불가의 존재로 격상시켰고, 관객은 그저 숭배할 따름이었다.

‘뉴 유니버스’는 이 공식을 정면으로 배반(背反)·배격(排擊)한다. 평행우주에서 건너온 여러 스파이더 피플—배나온 중년의 피터 B. 파커, 펑크록 스타일의 스파이더 그웬, 흑백 느와르의 스파이더맨 누아르, 심지어 돼지 스파이더 햄—은 저마다 ‘영웅의 유일무이함’을 해체한다. 그들이 말하는 건 단순하다. 특별해서 영웅이 되는 게 아니라, 뛰어내리기를 선택해서 영웅이 된다는 것.

3.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거짓말

여기서 나는 이 낙관에 잠시 제동을 건다. 스크린 밖 현실은 어떤가. 한국 사회에서 “마스크는 누구나 쓸 수 있다”는 명제는 동화책 속 문장처럼 들린다. 부모 자산 상위 10%의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소득 상위권을 유지할 확률은 압도적이다. 계층 사다리는 녹슬었고,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속담은 역사의 유물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영웅 서사란 흔히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금수저들이 ‘노력 서사’를 덧입은 성공담 아닌가.

그래서 마일스의 도약은 더 씁쓸하게 빛난다. 그가 브루클린의 좁은 골목에서 뛰어오르는 장면은 현실에선 불가능해 보이는 수직 상승을 그린다. 영화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속삭이고, 나는 그 속삭임을 사랑하면서도 의심한다. 내 직업이 남의 그럴듯한 이야기에 의심을 품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

4. 슈퍼히어로 영화의 미래

‘뉴 유니버스’는 프랜차이즈 피로가 만연한 시대에 블록버스터도 예술일 수 있음을 입증한다. 상업적 명령과 창작 야심이 반드시 적대할 필요는 없다는, 흔치 않은 증거물이다. 시각적 과부하가 가끔 숨을 막히게 하긴 하지만, 그조차 반복 관람을 유도하는 전략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마스크가 정말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면, 왜 우리는 마스크 대신 족쇄를 더 자주 마주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