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하늘에 머뭇거리는 남자 — 슈퍼맨

「슈퍼맨」 (Superman) · 제임스 건 (James Gunn) · 2025

슈퍼맨 (2025) 이미지
「슈퍼맨」 (2025) 이미지 © TMDb

극장을 나서며

지난달, 또 한 편의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서가 아니라 더 볼 이유를 찾지 못해서였다. 집에 돌아와 어릴 적 본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을 떠올렸다. VHS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돌려봤던 그 영화. 빨간 망토가 바람에 펄럭이던 기억. 그리고 그게 왜 지금은 불가능해 보이는지 생각했다.

제임스 건의 〈슈퍼맨〉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액션이 아니다. 클락 켄트가 추락하는 비행기를 구한 직후, 하늘에 떠서 머뭇거린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인디와이어》의 데이빗 엘리히는 이 장면을 두고 “인간들 사이의 신이 여전히 캔자스 시골의 수줍은 아이”라고 썼다. 나는 그 한 문장에서 이 영화의 방향 전체를 읽었다.

선함이라는 도발

2025년에 진심 어린 영웅주의는 거의 반문화(反文化)다. 우리는 냉소에 익숙해졌고, 슈퍼히어로에게 고뇌와 어둠을 요구했다. 잭 스나이더의 DC는 그 요구에 충실했고, 결국 무너졌다.

나도 그 냉소의 공범이었다. 슈퍼맨이 웃으면 “순진하다”고, 울지 않으면 “깊이가 없다”고 말했다. 10년 동안 그렇게 굴었다.

건은 다른 선택을 한다. 데이비드 코렌스웻의 슈퍼맨은 자신의 힘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힘을 어떻게 쓸지 고민한다. 전자는 자기연민이고, 후자는 윤리(倫理)다. 이 차이가 영화 전체를 가른다. 스몰빌 시퀀스들은 테런스 말릭의 황금빛을 의식적으로 빌려왔다. 양부모와의 대화, 밀밭 사이의 침묵. 건은 히어로의 기원을 의무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거기서 감정의 뿌리를 심는다. 여기서 나는 또 깨닫는다. 내가 10년 동안 슈퍼히어로 영화를 잘못 봐왔다는 것을.

레이첼 브로스나핸의 로이스 레인은 단순한 연인이 아니다. 그녀와 클락의 관계는 끌림이 아니라 상호 인정에 기반한다. 《버라이어티》의 오웬 글라이버만이 말한 대로, 140분의 러닝타임 동안 모든 액션이 캐릭터의 판돈에 묶여 있다. 폭발은 많지만 마비는 없다.

냉소 이후의 풍경

물론 결함(缺陷)도 있다. 빌런의 동기는 때때로 장르의 상투로 미끄러지고, DC 유니버스를 구축하려는 흔적들이 유기적 서사를 방해한다. 건이 제작자로서 풀어야 할 숙제가 고스란히 노출된 자리들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도발은 그런 데 있지 않다. 건은 “선함이 영감을 줄 수 있다”는 명제를 정면으로 밀어붙인다. 우리가 모든 영웅의 뒤에서 위선을 찾고, 모든 진심 뒤에서 계산을 의심하는 시대에, 그는 그냥 빨간 망토를 입힌다. 그것이 2025년에는 정치적 발언과 다름없다. 믿어도 된다고, 누군가는 진짜로 도우려 할 수 있다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성공은 슈퍼히어로 장르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10년간의 암울함, 냉소, 피로감이 없었다면 이토록 솔직한 영웅주의가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건이 부활시킨 건 슈퍼맨이 아니라, 우리가 영웅을 믿을 수 있었던 시절의 감각이다. 그리고 그 감각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을 완전히 잃어야 했다. 장르의 죽음이 장르의 생명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