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왕위는 피로 흐른다 — 라이온 킹
「라이온 킹」 (The Lion King) · 로저 알러스, 롭 민코프 (Roger Allers, Rob Minkoff) · 1994
1. 붉은 태양이 아프리카 지평선 위로 솟아오른다. 코끼리 무리가 먼지를 일으키며 행진하고, 얼룩말과 기린이 프라이드 락을 향해 모여든다. 비비 원숭이 라피키가 갓 태어난 사자를 절벽 끝에서 치켜드는 순간, 동물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장엄하다고 불리는 ‘서클 오브 라이프’ 시퀀스다. 이 장면을 처음 본 뒤 나는 불쾌했다. 태어나자마자 왕으로 선포되는 아기 사자라니.
2. 영국의 한 영화 평론가이 영화가 “세습 통치와 자연 질서를 등치시키는 보수적 세계관”을 품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무파사 치세의 프라이드 랜드는 푸르고 풍요롭지만, 스카가 왕좌를 찬탈하는 순간 가뭄이 들고 땅이 황폐해진다. 정통 왕권이 곧 번영이라는 공식. 햄릿의 뼈대를 빌려왔으면서 햄릿의 회의는 빠졌다. 심바는 고민하지 않는다. 돌아가서 삼촌을 물리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
3. 그럼에도 기술적 성취는 부정하기 어렵다. 누우 떼가 협곡을 내달리는 시퀀스는 컴퓨터 그래픽과 전통 애니메이션의 결합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보여주었다. 무파사의 죽음이 아동영화로선 이례적으로 직접 묘사되는 점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하이에나들이 내뱉는 도시 빈민가풍 억양은 오늘 다시 보면 불편함을 준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하층민을 쫓아내야 왕국이 회복된다는 서사.
4. 어린 시절 이 영화를 열두 번쯤 보면서 울었다. 아버지의 죽음, 심바의 방황, 귀환. 지금 다시 보니 운 이유가 달라졌다. 세습을 자연법칙처럼 포장하는 이야기에 열광했던 과거의 내가 민망해서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지금 더 현명한 어른이 되었느냐 하면, 글쎄. 여전히 만화영화 한 편에 복잡한 심정을 느끼며 글을 쓰는 걸 보니, 나야말로 ‘하쿠나 마타타’가 절실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