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중간이란 자리의 무게 —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 (The Lord of the Rings: The Two Towers) · 피터 잭슨 (Peter Jackson) · 2002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 (2002) 이미지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 (2002) 이미지 © TMDb

3부작의 두 번째 편은 실패하게 되어 있다. 시작의 설렘도 끝의 카타르시스도 없이, 중간편은 징검다리라는 굴욕만 감당한다. 《대부 2》와 《제국의 역습》을 예외로 거론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예외이기 때문에 기억되는 것이다.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이 이 저주를 깨뜨렸다고 말하는 건 그래서 평범한 칭찬이 아니다. 이 영화는 중간이라는 구조적 핸디캡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중간이어야만 가능한 어둠을 정면으로 껴안았다.

전편 《반지 원정대》가 샤이어의 푸른 언덕과 리븐델의 엘프적 온기로 관객을 유혹했다면, 《두 개의 탑》은 그 약속을 배신한다. 카메라는 폐허만 비춘다. 침수된 아이센가드, 시체로 뒤덮인 로한의 들판, 모르도르로 향하는 잿빛 사면. 촬영감독 앤드류 레스니와 잭슨이 직조한 이 풍경들은 아름답되 위로가 없다. 관객은 이제 목가(牧歌)가 아닌 만가(挽歌)를 듣게 된다.

골룸은 이 영화의 진짜 핵심이다. 영국의 한 영화 평론가이 지적했듯, 이전의 스크린 골룸들은 늘 ‘명백한 인공물’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앤디 서키스의 모션 캡처와 WETA의 디지털 아티스트들이 빚어낸 이 생물체는 캐릭터 연기의 경계를 다시 쓴다. 스메아골과 골룸이 서로를 고발하는 장면—카메라가 그 일그러진 얼굴을 응시한 채 물러서지 않는 순간—은 CG 기술의 시연이 아니라 심리극의 클라이맥스다. 우리는 프로도의 미래를 본다. 반지에 잠식당한 존재가 어떻게 자기 자신과의 내전에서 패배하는지. 이것은 중독의 초상이며, 자아 분열의 임상 기록이다.

영화는 세 개의 서사 축을 교차 편집한다. 프로도와 샘의 모르도르 행군, 아라곤과 나머지 원정대의 로한 구출, 메리와 피핀의 엔트 숲 표류. 이 병렬 구조가 소설에서는 자연스럽게 흘러갔지만, 스크린 위에서는 호흡을 지연시키는 위험 요소가 된다. 특히 엔트 시퀀스는 줄어든 러닝타임 속에서 가장 많이 압축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잭슨은 이 구조적 한계를 무리하게 은폐하지 않는다. 그는 중간편의 비완결성을 받아들이면서, 대신 각 축 안에서 심리적 완결을 추구한다. 테오덴 왕(버나드 힐)이 아들의 무덤 앞에 서는 장면, 파라미어가 반지의 유혹 앞에서 흔들리는 장면—이런 순간들이 ‘다음 편에 계속’의 좌절감을 상쇄한다.

헬름스 딥 전투는 이 영화의 마지막 40분을 집어삼킨다. 비평가들은 쿠로사와와 본다르추크의 이름을 소환했고, 그 비교는 정당하다. 그러나 잭슨의 진짜 성취는 거대한 전장의 오케스트라 지휘에 있지 않다. 그것은 수천 명의 병력 사이에서 개별 얼굴을 놓치지 않는 편집에 있다. 레골라스의 곡예적 궁술은 볼거리지만, 농부로서 칼을 쥔 로한 민병대원의 떨리는 눈빛이 이 전투의 진짜 무게를 지탱한다. 빗줄기 속에서 검이 부딪힐 때마다 하워드 쇼어의 스코어는 승전가가 아니라 장송곡을 연주한다. 전쟁의 비용을 관객에게 직시시키겠다는 잭슨의 의지가 여기서 분명해진다.

그런데 왜 2002년의 전쟁 영화가 지금도 유효한가. 《두 개의 탑》이 개봉한 해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확대하고 이라크 침공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영화 속 사루만의 산업화된 군대—우루크하이 공장—는 대량 생산된 폭력의 은유로 읽힐 수밖에 없었다. 톨킨은 양차 대전의 참호에서 이 이야기를 구상했고, 잭슨은 그 원형적 공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작동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절망적 수세에 몰린 사람들이 그래도 성벽 위에 서는 장면—이 이미지가 가진 정치적 전복성(顚覆性)은 시대를 초월한다. 압도적 힘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 그 선택에 무슨 전략적 계산 따위는 없다는 것. 이것은 저항의 미학이자 희망의 정의(定義)다.

영화는 해결 없이 끝난다. 프로도는 여전히 모르도르를 향해 걷고, 반지는 여전히 그의 목에 걸려 있다. 그러나 관객은 불완전함에 좌절하기보다 기다림 자체를 견디는 법을 배운다. 중간의 자리에 있다는 것,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안에 있다는 것—이것이 《두 개의 탑》이 그린 풍경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중간편을 살고 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디든, 끝이 아직 오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당신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