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투구 속의 아버지 — 만달로리안과 그로구
「만달로리안과 그로구」 (The Mandalorian and Grogu) · 존 파브로 (Jon Favreau) · 2026
1.
지난해 미국 갤럽이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 남성의 57%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죄책감을 안고 산다. 딘 자린이라는 사내가 관객의 심금을 건드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페드로 파스칼은 투구 안에서 목소리와 몸짓만으로 연기한다. 은닉(隱匿)과 현현(顯現)의 역설. 얼굴을 감출수록 내면이 드러난다. 그로구라는 말 못 하는 녹색 생명체와 나누는 교감은 대사 없이 진행되고, 그래서 더 묵직하다.
2.
존 파브로는 TV 시리즈를 극장으로 옮기면서 화면을 키웠다. 우주선 격투, 총격전, 광선검 전투가 스크린을 채운다. 그런데 위기감이 없다. 주인공들이 살아남으리라는 확신이 긴장을 잠식한다. 《인디와이어》의 데이비드 얼리히는 이 영화에서 “아버지됨과 정체성, 제국 붕괴 이후 새것을 건설하는 일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묻혀 있다”고 썼다. 폭발 사이사이 숨을 헐떡이며 올라오는 그 이야기가, 정작 감독은 믿지 못한다. 조용한 장면 뒤엔 어김없이 폭음이 따른다. 구로사와와 세르조 레오네의 유산을 빌려 왔으되, 구조가 아닌 장식으로만 쓴다. 그러니 서부극처럼 ‘보이지만’ 놀이기구처럼 ‘달린다’.
여기서 한국 사회가 겹쳐 보인다. 권위주의 체제가 무너진 뒤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작업. 신공화국이 영화 속에서 “필요하지만 비효율적”으로 그려지듯, 우리 역시 권위의 잔해(殘骸) 위에서 거버넌스를 논하며 진전과 퇴행을 오갔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질문을 회피한다. 정의란 무엇인지, 폐허 위에 무엇을 세울 것인지 묻지 않는다. 중도(中道)를 빙자한 태만이다. 악당은 편리하게 존재하고, 질서는 막연히 요청된다. 그 공백 속에서 관객은 아버지와 아들의 정(情)에만 기댄다.
3.
그래도 이 영화에는 순간이 있다. 후반부, 희생과 재회가 교차하는 시퀀스에서 거의 시(詩)에 가까운 정조가 스친다. 루드비히 요란손의 음악이 오케스트라와 전자음을 섞어 감정을 직조한다. 그 순간만큼은, 2억 달러짜리 기계 안에서도 숨결이 느껴진다. 문제는 그 순간들이 전체를 정당화하느냐는 것이다. 더 나은 영화의 편린이 이 영화를 가치 있게 만드는가, 아니면 아쉽게 만드는가.
딘 자린은 시리즈 내내 한마디를 되뇐다. “이것이 길이다(This is the Way).” 하지만 길이란 원래 걸어봐야 길인 법. 걷지 않으면 그저 포장(鋪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