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벽 너머의 비명, 조용한 정원 — 레이첼 니켈 살인 사건
「레이첼 니켈 살인 사건」 (The Murder of Rachel Nickell) · 로빈 세스 굿맨 (Rowan Seth Joffe) · 2026
[1] 1992년 7월, 런던 윔블던 커먼. 화면은 이른 아침의 공원을 비춘다. 한 여자가 두 살 아들의 손을 잡고 산책한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고, 바람에 풀잎이 흔들린다. 목가적(牧歌的) 풍경이다. 그리고 갑자기, 영화는 그 평화를 조각낸다. ITV의 〈레이첼 니켈 살인 사건〉은 이렇게 시작한다. 23세 레이첼 니켈이 백주에 살해당하고, 그 곁에 피투성이 엄마를 부르는 두 살짜리가 남겨진 사건. 영국을 발칵 뒤집은 이 참극을 영화는 묵직한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2] 그런데 이 영화가 추적하는 것은 살인마가 아니다. 경찰이다. 메트로폴리탄 경찰은 콜린 스태그라는 사회 부적응자에게 혐의를 씌웠다. 증거가 없었다. 그래서 경찰은 ‘에델 작전(Operation Edzell)‘이라는 전대미문의 함정 수사를 펼친다. 여성 잠입경찰 ‘리지 제임스’가 스태그에게 접근해 연인 행세를 하며, 그의 성적 환상(幻想)을 자극하고, 가공의 살인 욕망을 고백하도록 유도한다. 국가가 외로운 남자의 인격을 도살해가며 자백을 뜯어내려 한 것이다. 《가디언》이 “심리적 강압을 정당한 수사 방법론으로 취급한 윤리적 파산”이라고 쓴 이유다. 영화는 이 장면들을 길게 늘어뜨리며 관객의 위장을 뒤튼다. 불편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한 민주주의 국가의 사법 기관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이다.
[3] 스태그는 무죄였다. 진범 로버트 내퍼가 밝혀진 것은 17년 후인 2008년이었다. 경찰은 처음부터 내퍼를 용의선상(容疑線上)에 올렸다가 지문 대조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묵살했다. 왜? 이미 스태그가 ‘범인’이라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증거보다 서사(敍事)가 먼저였다. 확증 편향이 수사를 지배했고, 기관은 자기 확신의 포로가 됐다. 여기서 나는 멈칫한다. 이 이야기가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우리는 이런 구조를 수없이 봐왔다. 수사기관이 먼저 범인을 지목하고, 그다음 증거를 끼워 맞추는 일. 여론을 등에 업은 정의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이 짓밟히는 일. 영화가 보여주는 1990년대 영국의 모습은, 2020년대 한국의 거울이기도 하다. 우리는 늘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진실을 ‘연출’하려 하지 않았던가.
[4] 영화의 가장 통렬한 아이러니는 레이첼 니켈 자신이 자기 이야기에서 부차적 존재로 밀려난다는 점이다.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경찰의 탐욕과 스태그의 고통이다. 레이첼은 홈비디오 영상으로 잠깐 등장할 뿐이다. 피해자가 지워지고 시스템의 실패만 남는 구도. 이것 역시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뉴스에서, 재판정에서, 피해자의 이름은 잊히고 가해자와 수사기관의 드라마만 요란하게 재생된다. 로원 조프 감독은 이 불편함을 의도했을 것이다. 영화는 끝내 묻는다. “당신들은 정의를 추구했는가, 아니면 승리를 원했는가(Did you pursue justice, or did you just want to win).” 이 질문은 영국만의 것이 아니다. 오늘, 이 순간, 한국의 법정과 국회와 수사기관 앞에 똑같이 던져진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