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생존의 윤리학 —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The Pianist) · 로만 폴란스키 (Roman Polanski) · 2002
[1]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60% 이상이 증언을 거부했다는 통계가 있다. 말해봤자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는 그 침묵의 언어로 쓰인 영화다. 크라쿠프 게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머니를 아우슈비츠에서 잃은 폴란스키가, 60대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꺼낸 증언. 《버라이어티》의 토드 매카시는 이 영화를 “생존 그 자체가 유일한 저항이 되는 순간”이라 평했다.
[2]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연기하는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프 쉬필만은 영웅이 아니다. 가족이 트레블링카로 끌려가는 동안 숨고, 타인의 죽음 위에서 살아남고, 도움을 받되 갚지 못한다. 영화 후반부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폐허가 된 바르샤바를 유령처럼 배회하며, 쓰레기통을 뒤지고, 썩은 오이 통조림에 손을 찔러 넣는다. 굶주림(飢)과 은신(隱)과 공포(怖)가 뒤섞인 그의 얼굴에서, 정체성이란 것이 얼마나 쉽게 지워지는지를 우리는 본다.
[3] 이 영화의 가장 무서운 점은 폭력의 돌발성이다.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사살되는 여자, 식량을 밀수하다 구타당해 죽는 아이. 폴란스키는 이 장면들을 강조하지 않는다. 마치 날씨를 기록하듯 담담하게 찍는다. 그게 일상이었으니까. 영화 말미, 쉬필만을 발견하고도 살려주는 독일 장교 빌름 호젠펠트는 실존 인물이다. 괴물도 성자도 아닌 이 남자 앞에서 쉬필만이 쇼팽을 연주할 때, 예술이란 것의 무력함과 끈질김이 동시에 드러난다. 구원은커녕 빵 한 조각도 주지 못하는 음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것을 만들어낸다.
[4] 생존자는 왜 살아남았는지 설명해야 할 의무가 없다. 다만 증언할 뿐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도 ‘어느 쪽이냐’고 다그치며 총구를 겨누는 자들이 넘친다. 그들 앞에서 이 영화의 침묵이 더 크게 들린다. 나는 그저 살아남은 자의 증언을 받아 적는 필경사일 뿐인데, 마감에 쫓기다 보니 이것도 제법 그럴듯한 칼럼처럼 보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