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지하실로 내려가는 일에 관하여 — 양들의 침묵
「양들의 침묵」 (The Silence of the Lambs) · 조나단 드미 (Jonathan Demme) · 1991
그 장면을 다시 본다
심리 스릴러를 논할 때마다 나는 ‘시선’이라는 단어를 꺼낸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변명하지 않겠다. 다만 《양들의 침묵》 앞에서 이 단어가 유독 무거워지는 이유는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영화비평가 에이미 토빈은 이 영화가 180도 법칙을 의도적으로 위반한다고 지적했다. 클라리스와 렉터가 대화할 때 두 사람 모두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순간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바라보아지고 있다. 심문당하는 쪽은 관객이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한다. 정확히 무슨 감정이었는지는 잊었지만, 불편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지금 다시 보아도 그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선명해졌다. 좋은 영화가 무엇인지 자문할 때, 나는 종종 이런 종류의 불편함을 떠올린다. 시간이 지나도 마모되지 않는 날카로움 말이다.
공간 속의 여자
조나단 드미는 클라리스 스탈링이 차지하는 공간의 크기를 끊임없이 측정한다. 영화 초반, 엘리베이터 안에서 클라리스는 빨간 셔츠를 입은 남성 FBI 훈련생들에게 둘러싸인다. 그들 모두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크다. 카메라는 이 장면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기록한다. 증거물처럼.
조디 포스터의 연기가 이 시각적 전략에 몸을 부여한다. 클라리스는 피해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슈퍼히어로도 아니다. 웨스트버지니아 억양을 조심스럽게 유지하면서, 남자들의 세계에서 공간을 확보하는 법을 체득한 여자다. 그 체득의 과정에는 상처가 있었을 것이고, 영화는 그 상처를 직접 보여주는 대신 렉터의 질문을 통해 발굴한다. 클라리스가 양들의 비명을 들었던 어린 시절. 그녀가 FBI에 들어온 진짜 이유. 이 모든 것이 살인사건 수사라는 외피 아래에서 또 다른 서사를 형성한다.
나는 여기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정확한 표현이 있다. 이 영화는 ‘남성적 시선’이 무엇인지 시각적으로 논증한다. 클라리스를 바라보는 수많은 남자들의 눈—보호적인 것, 탐욕적인 것, 과소평가하는 것—을 드미는 다큐멘터리처럼 나열한다.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괴물의 고요함
앤서니 홉킨스에게 주어진 스크린 타임은 전체의 2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이 숫자를 처음 들었을 때 믿지 않았다. 체감으로는 그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홉킨스의 한니발 렉터는 광기 어린 괴성을 지르지 않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인용하고, 르네상스풍 드로잉을 그리고, 상대방의 문장을 정중하게 교정한다. 그의 위협은 고요함에서 나온다.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언제 움직일지 모른다. 폭력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 그 대비 효과는 압도적이다. 절제가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이 연기는 증명한다.
포스터와 홉킨스의 장면들은 기묘한 케미스트리를 만들어낸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조종하려 하고,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 하며,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드러낸다. 렉터가 클라리스에게 보이는 감정이 무엇인지—진정한 호의인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인지—영화는 명확하게 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호함이 이 관계를 잊을 수 없게 만든다.
버팔로 빌이라는 문제
영화에는 또 다른 괴물이 있다. 여성의 피부를 벗겨 옷을 만들려는 연쇄살인범 버팔로 빌. 이 캐릭터는 개봉 당시에도 논쟁거리였고, 지금은 더 복잡한 지형 위에 서 있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에 대한 부정적 재현이라는 비판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영화가 이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다만 각본이 의식적으로 구분을 시도했다는 점은 언급해야 한다. 렉터는 빌이 진정한 트랜스젠더가 아니라고 명시적으로 말한다. 빌은 여성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여성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며, 그 소유의 방식이 파괴를 경유한다는 것. 이것이 충분한 해명인지, 아니면 면죄부에 불과한지는 각자가 판단할 문제다.
나는 이 장면들을 볼 때마다 불편하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 영화의 결함인지, 아니면 영화가 다루는 주제의 본질적 속성인지 매번 헷갈린다. 셀프디스 같지만 사실이다.
영화는 무엇을 남기는가
야간 투시경 시퀀스. 암흑 속에서 클라리스의 뒤를 밟는 빌의 손. 관객은 빌의 시점을 강제로 공유하면서 클라리스의 무력함을 목격한다. 기술적으로 완벽한 장면이다. 동시에, 우리가 그 시점을 공유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다. 드미는 이 불쾌함을 의도했을 것이다. 스릴러의 쾌감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 우리가 누구의 눈으로 보기를 선택하는지, 이 영화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양들의 침묵》은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아카데미 주요 5개 부문을 석권했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드문 사례라는 평가가 따라붙었다. 나는 그 평가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30년이 넘도록 살아남은 이유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괴물을 쫓는 사람은 괴물을 닮아가는가. 아니면, 괴물을 바라보는 우리가 이미 괴물과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는 것인가. 클라리스가 마침내 양들의 비명에서 벗어났는지,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