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마을이 곧 야수다

「미녀와 야수」 (Beauty and the Beast) · 게리 트루스데일 + 커크 와이즈 (Gary Trousdale + Kirk Wise) · 1991

미녀와 야수 (1991) 이미지
「미녀와 야수」 (1991) 이미지 © TMDb

미국의 한 영화 전문지는 《미녀와 야수》를 두고 “애니메이션이 뮤지컬 영화 예술의 정점에 닿은 작품”이라고 썼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쁜 그림과 노래 부르는 식기들을 ‘명작’이라 부르는 어른들이 유난스럽게만 보였다. 이 영화의 진짜 얼굴은 미녀와 야수의 결말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내야 했던 마을에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이야기의 무대는 프랑스의 어느 지방 마을. 벨은 책을 읽는 아름다운 여자이고,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이상하다’고 수군댄다. 가스통은 그 마을이 승인하는 남성성의 화신이다. 잘생기고 사냥을 잘하며, 자신을 거절하는 여자를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멸시할 줄도 안다. 야수의 성은 마을의 대척점에 서 있다. 겉은 흉측하지만, 그는 벨에게 성 안의 서재를 통째로 내준다. 가스통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 같은 남자다. 마을은 그에게서 ‘좋은 신랑감’을 보고, 그는 마을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확인한다. 거울이 ‘나를 보라’는 자아도취(自己陶醉)의 명령이라면, 책은 ‘세상을 보라’는 초청이다. 벨이 이 괴물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피상(皮相)적인 매력이 아니라 그 초청에 응답하는 과정이다.

이 마을은 우리의 축소판이다. 외모와 재산, 직장과 집안이 연애의 화폐로 통용되는 사회에서 가스통은 어디에나 있다. 문제는 그가 잘생겼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할 줄 안다는 데 있다. 거절당한 남자가 “야수를 잡으러 가자”고 선동하자, 평범한 이웃들이 횃불과 쇠스랑을 든다. 그 군중에는 확고한 악의보다 동조(同調)의 욕망이 먼저 있다. 동네의 표준에서 벗어난 이방인을 ‘야수’로 부르는 일은 이렇게 쉽다. 벨은 마을에서 미녀이되 이방인이고, 야수는 성에서 주인이되 괴물이다. 그 둘은 결국 같은 마을의 밖에 서 있었다.

영국의 한 신문은 이 영화의 힘이 마법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에 있다고 평했다. 그 지적은 절반만 맞다. 벨의 시선이 바뀌는 것은 맞지만, 마을의 시선은 끝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역설은 결말에 있다. 저주가 풀리는 순간 야수는 미남 왕자로 돌아온다. 벨이 사랑한 것은 서재를 내어준 짐승의 태도였는데, 영화는 그 사랑을 ‘정상적인 미남’이라는 외피로 환원해 버린다. 실패한 짐승이 곧 성공한 연인이었고, 성공한 인간 왕자는 실패한 야수의 잔상을 한 겹 덮은 허상(虛像)이다.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마을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 크게 들린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결국 다시 찾아온 ‘정상’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