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귀여운 여인, 명품 로고로 덮은 핏자국
「귀여운 여인」 (Pretty Woman) · 게리 마샬 (Garry Marshall) · 1990
1990년 할리우드산 로맨틱코미디가 30년 넘은 한국 사회의 거울 앞에서 되살아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귀여운 여인』은 그 물음에 할 말이 많은 영화다. 미국의 한 비평가는 이 작품을 두고 “저항하는 쪽이 오히려 유치해 보일 만큼 뻔뻔하다”고 평한 바 있다. 그 뻔뻔함은 동화의 공식에 대한 과감한 복원에서 나온다. 할리우드는 성노동을 무균화하고, 사적 자본을 낭만화하고, 여성의 구원을 억만장자의 결제 한도에 위탁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30년 넘게 재생된다. 낡은 환상기제(幻想機制)가 우리의 연애와 계급 상상력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정치적 선언은 로데오 드라이브의 고급 부티크에서 완성된다. 판매원에게 가난한 매춘부라는 이유로 모욕당하고 쫓겨난 비비안은, 얼마 뒤 억만장자의 신용카드로 쇼핑백을 양손에 든 채 다시 그 가게에 들어선다. 그 장면이 통쾌한 것은 소비가 복수의 문법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리의 근거가 남자의 카드 한 장이라는 점에서 이 통쾌함은 처음부터 비틀려 있다. 줄리아 로버츠의 얼굴은 그 비틀림을 잠시 지운다. 한 외신 평자는 로버츠의 연기에서 “문제적 인물을 관객이 진심으로 응원하게 만드는 감염성”을 읽었는데, 정확한 말이다. 비비안은 거리의 생존력과 소녀 같은 취약함을 오가며, 매춘을 직업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오점처럼 보이게 만든다. 리처드 기어의 억만장자는 냉장고에서 갓 꺼낸 듯한 얼굴로 그 앞에서 녹는다. 호텔 스위트에서 벌이는 3000달러짜리 일주일 계약 협상은 로맨틱코미디가 아니라 경제학 수업에 가깝다. 비비안은 자신의 고용 조건을 정확히 따지고, 에드워드는 비용과 편의를 교환한다. 이 계약 장면은 이후의 낭만적 전개가 사실은 조건과 결제의 연장선임을 미리 고백한다. 오페라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비비안을 지켜보는 남자의 시선은 이미 구원자의 시선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입구에서 제기한 질문을 출구에서 슬그머니 버린다는 사실이다. 거리의 위험은 비비안의 낙관적 어조 속에 반쯤 지워지고, 성노동의 물질적 조건은 호텔 스위트의 흰 침대시트 밑으로 밀려 들어간다. 라 트라비아타의 창녀는 사랑에 소모되어 죽어가는데, 『귀여운 여인』은 그 비극을 객석의 눈물로 소비한 뒤 곧바로 서사를 신데렐라의 드레스로 갈아입힌다. 이쯤 되면 이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계급상승(階級上昇)의 광고이자 허위의식(虛僞意識)의 연장이다. 남자의 세계는 기업 사냥과 주식 매입이라는 냉혹한 자본의 언어로 그려지고, 여자의 세계는 오직 남자의 결제 한도만큼 넓어진다. 영화는 이 모순을 캘 생각이 없다. 바닥을 치던 여자가 꼭대기 남자의 와이셔츠를 입고 아침을 맞는 장면을 낭만으로 포장하는 데 집중할 뿐이다.
그런데 이 동화는 한국 사회에서 더 교묘하게 재연된다. 재벌 혼사가 연예 뉴스의 윗자리를 차지하고, 청년들은 청약 통장과 데이트 신청을 오가며 ‘조건’을 연애의 동의어처럼 쓰는 시대다. 한국적 문법으로 바꾸면 이렇다. 가난한 여자는 부자 남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산가’를 만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성공 서사가 되어 온라인 예능과 커뮤니티의 상수를 장식한다. 유리구두는 명품 구두로, 호박마차는 수입차로, 왕자의 성은 강남 아파트 단지로 표기만 바뀐다. 그 세계에서 비비안의 구원은 결제 한도의 문제로서 여전히 유효하며, 매춘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명품 시계와 프러포즈 이벤트로 무균화된다. 자의식(自意識)의 한 대목을 고백하자면, 나는 이 문장을 쓰면서도 광고 배너의 쇼핑백 장면에서 손가락이 멈췄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남기고 성으로 올라간 밤, 계단 아래에는 그 구두를 줍다 베인 빈자의 손바닥이 남는다. 우리는 아직 그 상처를 하이힐 앞코로 가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