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투모로우, 기후는 망하고 흥행은 산다
「투모로우」 (The Day After Tomorrow) · 롤랜드 에머리히 (Roland Emmerich) · 2004
이 영화는 기후를 구원하려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재난을 파는 장사다. 한 미국 영화 전문지는 “오존층만큼 얇은 인간 드라마”라고 비웃었지만, 그 비웃음마저 이 영화에겐 홍보 문구로 쓰인다. 롤랜드 에머리히는 백악관을 날리고 고질라로 맨해튼을 밟은 연출자다. 이번에는 인류가 자초한 기후변화를 카테고리 5 허리케인의 섬세함으로 다룬다. 뉴욕 한복판으로 밀려드는 파도는 택시를 탁구공처럼 굴리고, 토네이도는 할리우드 사인을 폐허로 만들며, 도쿄에는 골프공 크기의 우박이 떨어진다. 제작비 1억 2500만 달러는 파괴의 향연으로 반환된다.
하지만 그 향연은 120분을 지탱하지 못한다. 데니스 퀘이드는 기후학자 잭 홀 역을 맡아 모니터를 응시하고 설명조 대사를 읊는다. 그의 경고는 부통령에게 무시당하고, 아들 샘(제이크 질렌할)은 얼어붙은 뉴욕 공공도서관에 갇혀 구조를 기다린다. 이 부자는 전화 통화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만 관계를 유지한다. 헬리콥터가 공중에서 얼어붙는 장면은 기술적으로 빼어나지만, 그 장면을 끌고 갈 인물은 없다. 얼어붙은 맨해튼의 풍경은 무섭도록 고요한 아름다움이 있으나, 그 아름다움은 파괴에 바치는 예배일 뿐 공포의 윤리를 대신하지 않는다. 센트럴파크 동물원에서 탈출한 늑대가 눈 덮인 도서관을 습격하는 대목에서는 이 영화가 더 이상 인간에게 기대기를 포기했다는 인상을 준다. 나는 이 장면들을 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 이 칼럼을 쓰는 사람부터가 파괴의 구경꾼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치적 메시지는 쓰나미만큼 미묘하다. 기후 위기를 부정하는 행정부가 등장하고, 과학자는 창밖의 재난을 직접 본 뒤에야 존중받는다. 과학적 개연성은 초반 10분 만에 얼어 죽는다. 수십 년이 걸릴 빙하기가 며칠 만에 닥친다는 설정은 기후학자를 기절시키겠지만, 에머리히는 정확성 때문에 오락성을 포기할 감독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 정치가 포개진다. 재난이 닥치기 전까지는 예산을 삭감하고 위원회를 없애고 대책을 파워포인트로 만든다. 재해가 지나간 뒤에는 “불가항력(不可抗力)“이라는 사자성어로 책임을 흐린다. 기상이변(氣象異變)은 자연의 문제인데, 대응은 언제나 정쟁의 재료가 된다. 폭염과 폭우가 일상이 된 나라에서도 기후 위기는 여전히 지역구 예산보다 가볍다. 수해가 나면 소방관은 영웅으로 소비되고, 복구 예산은 다음 선거의 공약이 된다. 청년들은 지구를 구하기 전에 월세와 대출부터 막아야 한다.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지구의 문제인데 우리 안에서는 계급과 지역으로 갈라진다.
그러니 이 영화의 진짜 마지막은 재난 영화의 오래된 공식 위에 있다. 경고와 구경거리를 한데 버무려 관객이 지구가 파괴되는 장면을 팝콘과 함께 소비하게 만든다. 관객은 스크린 앞에서 안도하며 기후 문제를 이미 해결한 듯한 도덕적 만족을 얻는다. 그리고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일회용 컵을 산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쓴다. 기후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고, 그 실패를 스펙터클로 파는 데는 성공했다. 실패가 곧 성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