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비평

악마의 계단을 오르는 법 — Yuja Wang (유자 왕)

「더 빈 리사이틀 (The Vienna Recital)」 · Yuja Wang (유자 왕) · Deutsche Grammophon · 2024

더 빈 리사이틀 (The Vienna Recital) - Yuja Wang (유자 왕) 음반 표지
Yuja Wang (유자 왕) — 「더 빈 리사이틀 (The Vienna Recital)」 (2024) 표지 © iTunes / 레이블

1.

2022년 4월 26일, 빈 콘체르트하우스. 무대 위 스타인웨이 앞에 앉은 유자 왕이 첫 음을 내려찍는다. 글루크/즈감바티의 오르페오 멜로디가 아니다. 도이체 그라모폰은 그날 밤 쇤베르크로 시작된 실제 공연에서 상당 부분을 잘라냈다. 음반에 남은 것은 베토벤, 브람스, 스크랴빈, 카푸스틴, 리게티, 글라스, 알베니스, 그리고 앙코르 마르케스. 순서마저 재배열됐다. 청중의 박수와 기침 소리도 거의 삭제됐다. 빈 특유의 의례(儀禮)와 공기가 증발한 자리에 남은 것은, 소리만으로 버티는 한 시간 반의 건축물이다.

2.

리사이틀이란 단어의 어원이 recite, 곧 ‘낭송하다’라는 점을 상기하면, 유자 왕의 빈 리사이틀은 낭송이라기보다 ‘전시(展示)‘에 가깝다. 베토벤 Op. 31 No. 3 소나타가 브람스 Op. 117 인터메초와 나란히 놓이고, 1897년 스크랴빈의 열병 같은 3번 소나타가 카푸스틴의 재즈 프렐류드와 손을 맞잡는다. 연대기적 계보도, 장르적 동질성도 거부하는 배열이다. 비평가들은 이 앨범에서 ‘큐레이터로서의 피아니스트’를 읽어낸다. 유자 왕은 작품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리듬의 실을 꿰었다. 스크랴빈 소나타의 점음(點音) 리듬이 카푸스틴의 흔들리는 스윙에 답하고, 브람스의 요람 같은 박동이 알베니스의 이베리아 발걸음과 공명한다. 그녀가 설계한 것은 ‘탈구된 춤(dislocated dance)‘의 연속체다.

3.

리게티 에튀드 13번 ‘악마의 계단(L’escalier du diable)‘이 앨범의 정점이자 시험대다. 이 곡은 손가락의 내구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고문 장치로 악명 높다. 유자 왕은 여기서 인내력 테스트를 거부한다. 대신 다섯 분 남짓의 현기증 나는 건축을 쌓는다. 음역이 올라갈수록 다이내믹도 높아지고, 악마의 계단은 실제로 눈앞에서 솟아오르는 듯하다. 리게티가 악보에 적어둔 ffff의 정점에 완전히 도달했는가. 일부 평자는 “조금 더 밀어붙일 여지가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유자 왕은 폭발 직전에서 멈추는 법을 안다. 그녀의 기교(技巧)는 제어 가능한 불꽃이다. 카푸스틴 재즈 프렐류드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스윙감은 클래식 피아니스트에게서 좀처럼 듣기 어렵다. 리듬의 정밀함이 매끈함으로 전락하지 않는 선(線)을 그녀는 정확히 밟는다. 음반 산업이 ‘패션 아이콘’이나 ‘무대 의상’으로 유자 왕을 소비하려 할 때, 그녀는 이 앨범으로 정반대의 메시지를 던진다. 나는 쇼맨이 아니라 건축가다.

4.

앙코르로 연주된 마르케스의 ‘단손 2번(Danzón No. 2)‘은 레티시아 고메스-타글레의 피아노 편곡본이다. 원곡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춤곡. 감상주의로 쉽게 미끄러질 수 있는 선율을 유자 왕은 형언하기 어려운 절제로 다스린다. 브람스의 인터메초 바로 뒤에 놓인 이 멕시코 단손은, 한 세기와 대양 하나를 건너 브람스와 악수한다. 둘 다 위안과 내면의 맥박을 품은 음악이다. 유자 왕은 그 유사성을 감지하고 배열했다. 클래식 음반 시장이 알고리즘과 스트리밍에 잠식당한 시대, 한 피아니스트가 여전히 ‘리사이틀’이라는 이름의 긴 호흡을 고집한다. 도이체 그라모폰의 돌비 애트모스 엔지니어링이 콘체르트하우스의 공간감을 최대한 살렸다. 좋은 좌석에 앉은 듯한 현실감. 그러나 청중 반응이 삭제된 음반은 특정한 밤의 기억을 지운다. 남은 것은 오로지 소리의 설계도다. 역설이 여기 있다. 라이브의 우연성을 지움으로써, 이 음반은 오히려 반복 청취에 최적화됐다. 현장성을 희생한 덕분에, 우리는 매번 새로운 성부(聲部)와 템포의 세부를 발견한다. 유자 왕의 빈 리사이틀은 ‘실황 녹음’의 정의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묻는다. 피아니스트에게 진정한 무대란 청중 앞인가, 마이크 앞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