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비평

여든여섯, 그가 침묵을 리듬으로 쓰는 법 — Charles Lloyd

「The Sky Will Still Be There Tomorrow」 · Charles Lloyd · Blue Note · 2024

The Sky Will Still Be There Tomorrow - Charles Lloyd 음반 표지
Charles Lloyd — 「The Sky Will Still Be There Tomorrow」 (2024) 표지 © iTunes / 레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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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 오래된 LP를 정리하다가 1966년 《Forest Flower》의 표지를 마주쳤다. 먼지를 털고 턴테이블 위에 올렸더니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건 28세 청년의 색소폰이었다. 젊은 찰스 로이드는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에서 그레이트풀 데드나 도어스 옆에 서서 록 팬들에게 재즈를 ‘들이밀던’ 사람이었다. 그의 옆에는 스물세 살 키스 자렛과 스물넷 잭 디조넷이 있었다. 그로부터 58년이 지난 2024년, 그 둘은 각자의 전설을 완성했고, 로이드는 86세에 또 한 장의 스튜디오 앨범을 냈다. 《The Sky Will Still Be There Tomorrow》. 블루 노트 레이블, 더블 앨범이다.

나는 한동안 그 앨범 제목을 곱씹었다. ‘내일도 하늘은 거기 있을 것이다.’ 이건 체념인가, 위안인가, 아니면 둘 다 아닌 어떤 것인가. 60년대 청년 로이드는 록 페스티벌 무대에서 신비주의를 폭발시켰다. 80대의 그는 같은 영성을 안쪽으로 접어 넣는다. 바깥으로 터지던 불꽃이 이제 촛불처럼 안정된 것이 아니다. 불꽃의 방향이 바뀌었을 뿐, 온도는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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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의 후기 경력을 추적하는 일은 그의 음색을 따라가는 일이다. 60년대에 그는 ‘큰 소리’로 귀를 사로잡았다. 색소폰이 록 밴드의 일렉트릭 기타와 경쟁하려면 볼륨이 필요했다. 그런데 80대에 접어든 그의 테너 색소폰은 전혀 다른 영역에서 작동한다. 소리의 크기 대신, 톤 자체에 인간의 호흡과 떨림을 새겨 넣는다. 어떤 평론가는 이를 ‘음의 인간미’라고 불렀는데, 적확한 표현이다. 플루트를 들 때는 필리그리 세공처럼 섬세하고, 테너를 불 때는 통제된 멜로디 라인과 표현주의적 절규를 한 곡 안에서 교차시킨다. 늙어서 부드러워진 게 아니라, 늙어서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이다.

이번 앨범의 편성부터 흥미롭다. 제이슨 모란(피아노), 래리 그레너디어(베이스), 브라이언 블레이드(드럼)—현재 재즈 신에서 이보다 무거운 이름 조합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이 네 명은 한 번도 함께 무대에 선 적이 없다. 로이드는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온 뉴 쿼텟 대신, 처음 만나는 세 사람을 스튜디오로 불러들였다. 왜였을까. 60년대 《Forest Flower》 시절, 그는 피아노-베이스-드럼이라는 가장 고전적인 쿼텟 포맷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이번에 그는 같은 포맷을 전혀 다른 화학반응으로 다시 쓰겠다는 것이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첫 합주부터 이들이 만들어내는 밀도는 오랜 동료의 그것보다 더 팽팽하다. 로이드는 젊은 세대의 거장들에게 넓은 공간을 내어준다. 모란이 셀로니어스 멍크적 불협화음을 끌고 들어올 때, 그레너디어가 베이스의 가장 낮은 영역에서 페달톤을 깔아줄 때, 블레이드가 침묵 자체를 리듬의 한 단위로 사용할 때—로이드는 마치 지휘자처럼 한 발 뒤로 물러난다. 평생 마이크 자리 한가운데를 차지할 수 있는 위치인데도, 그는 의도적으로 물러나 모란의 화성과 블레이드의 폴리리듬에 자신의 톤을 포갠다. 그 너그러움이야말로 그가 도달한 후기 양식의 진짜 표지(標識)다.

앨범 수록곡 대부분은 팬데믹 봉쇄 시기에 작곡됐다. 그래서인지 곡들이 ‘열린 형식’을 취한다. 테마-솔로-테마의 고전적 구조 대신, 각 트랙이 즉흥을 위한 풍경처럼 펼쳐진다. 네 사람의 ‘발명력과 창의력, 집단적 지혜’가 그 풍경을 메워 나간다. 더블 앨범이라는 용량(容量) 덕분에 로이드는 자신의 오마주 대상들을 한데 불러 모을 수 있었다. 1961년 불과 스물세 살에 요절한 트럼페터 부커 리틀에게 바치는 〈Booker’s Garden〉에서 플루트는 애도의 손길처럼 조심스럽다. 1900년에 작곡되어 흑인 민권운동의 비공식 국가가 된 〈Lift Every Voice and Sing〉까지 수록되어 있다. 여든여섯의 노인이 이 모든 좌표를 한자리에 모은 것은, 자기 경력의 유산을 정리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 유산이 여전히 동시대적임을 입증(立證)하려는 시도다.

앨범 후반부로 갈수록 즉흥의 밀도가 격해진다. 전반부가 단정한 멜로디와 송북에 가까운 정조였다면, 후반부는 4중주의 상호작용이 통제의 영역을 살짝 넘어선다. 그 ‘넘어섬’이 이 앨범의 진짜 골자다. 로이드는 회고록을 쓰는 대신, 자기 인생의 주석을 현재형 문장으로 다시 쓴다. 같은 세대의 많은 거장이 회상록 모드나 트리뷰트 모드로 후퇴할 때, 그는 자신의 모든 이력을 끌어다가 새로운 즉흥의 연료로 태워 버린다. 노년의 연륜과 분별이 박물관 진열장에 들어가는 대신, 불씨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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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Passin’ Thru》 이후 7년. 그 사이에 로이드는 2023년의 트리오 3부작을 비롯해 끊임없이 다른 편성을 시험해 왔다. 매번 새로운 조합으로 자신을 낯선 자리에 던지는 것—그의 80대는 그 실험의 연속이었다. 나이가 그의 야심을 갉아먹기는커녕, 오히려 야심의 표적을 더 깊은 곳으로 이동시켰다. 그가 도달한 노년의 양식은 ‘체념의 평온’이 아니라 ‘수긍의 호전성(好戰性)‘이다. 죽음을 직시하되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낙관. 이 더블 앨범은 그 낙관을 두 장의 LP로 밀어 넣는다. 어떤 평론가는 이걸 ‘엉덩이를 걷어차는 식의 권유’라고 불렀다. 틀린 말이 아니다.

내가 이 앨범을 처음 틀었을 때 전반부 15분쯤에서 잠이 들었다. 후반부에 접어들어서야 정신이 들었는데, 그제서야 로이드가 의도한 곡선이 보였다. 청자를 잠재웠다가 깨우는 것까지 계산한 연출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나만 졸았을 것이다. 분명한 건, 이 앨범을 카페 배경음악처럼 틀어놓는 것은 로이드의 86년을 모독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모독을 저질렀고, 글을 쓰면서야 겨우 속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