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비평

미해결의 연료 — Kanye West

「Kanye West — 2000년대 작업 전반」 · Kanye West · Roc-A-Fella / Def Jam · 2007

Kanye West — 2000년대 작업 전반 - Kanye West 음반 표지
Kanye West — 「Kanye West — 2000년대 작업 전반」 (2007) 표지 © iTunes / 레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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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예 웨스트의 2000년대 4부작은 해결하지 않았다. 흑인 정체성과 백인 자본 사이의 균열을, 신앙과 자아 신화 사이의 모순을, 갱스터 코드를 거부하면서도 그 코드가 제공했던 권위를 갈망하는 중산층 흑인 청년의 딜레마를. 《The College Dropout》부터 《808s & Heartbreak》까지 네 장의 앨범은 그 미해결 상태를 반복해서 재현했을 뿐이다. 해결책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해결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바로 그 거부가 이 작업들을 움직인 연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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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데뷔작이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학위가 흑인 청년을 구원하는가. 답은 아니오였다. 하지만 칸예는 그 아니오를 갱스터 랩의 거리 신화로 포장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칩멍크 처리된 소울 샘플 위에 말이 헛도는 일인칭을 얹었다. 졸업장을 거부하면서도 루이비통을 갈망하는 자기 모순을 숨기지 않았다. 스스로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그 재능을 증명하기 위해 남의 음악을 잘라 붙여야 했던 샘플러의 자기 의심까지.

그것은 1990년대 이후 메이저 힙합이 허용해온 흑인 남성성의 좁은 코드를 침범하는 일이었다. 거리의 생존자도, 컨셔스 랩의 도덕적 교사도 아닌 세 번째 페르소나가 등장했다. 신경증적이고, 탐욕스럽고, 종교적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의 노예인 일인칭. 그것은 시카고 중산층 흑인 가정에서 교수의 아들로 자란 한 청년이 백인 시스템과 흑인 시스템 양쪽에서 동시에 어긋났던 경험의 산물이었다.

2005년 《Late Registration》은 그 페르소나에 챔버 팝의 무게를 더했다. 존 브라이언과 협업한 오케스트라 편곡은 사치가 아니었다. 흑인 작가가 미국 팝의 ‘교향곡적 야망’이라는 영역에 입장료를 내고 자리를 차지한 사건이었다. 1970년대 시카고 소울과 90년대 R&B의 화성적 기억(記憶)을 디지털 시대 라디오에 다시 등록하는 작업이었다.

같은 해 카트리나 모금 방송에서 그는 대본을 이탈해 “부시는 흑인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생방송 도중의 그 발언은 흑인 분노의 텔레비전적 화신으로 그를 등극시켰다. 그러나 정작 그가 음악에서 말하고 있던 것은 쇼핑을 멈출 수 없다는 죄책감이었다. 인종 불평등에 대해 의미 있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정작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소비의 자기합리화뿐이라는 균열. 그 균열이 그의 작가적 엔진이었다.

2007년 《Graduation》에서 그는 시카고 소울 키드의 옷을 벗고 스타디움 사이즈의 신스 팝으로 갈아탔다. 다프트 펑크의 샘플과 다카시 무라카미의 아트워크. 50센트와 같은 날 발매 대결에서 거둔 판매상의 승리는 한 시대의 정서적 기조가 갱스터 코드에서 멜랑콜릭한 자기현시(自己顯示)로 옮겨갔음을 산업적으로 증명했다. 그러나 바로 그 승리의 순간에 그는 자기풍자를 버렸다. 자아 신화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대중성과 작가성의 균형은 가까스로 유지되었으나, 균형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지는 분명했다.

2008년 《808s & Heartbreak》는 그 자아 신화가 사적 재난과 충돌해 부서지는 소리였다. 어머니 돈다 웨스트의 성형수술 합병증 사망, 그리고 약혼의 파기. 그는 롤랜드 TR-808 드럼머신의 차갑고 합성적인 펄스 위에 오토튠으로 변조된 단성부 보컬을 올렸다. 흑인 남성 래퍼가 멜로디 라인으로 슬픔을 노래하는 일이 메이저 힙합의 한복판에서 허용된 첫 순간이었다. 갱스터 코드의 강성 페르소나를 거치지 않고도 메이저 차트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을, 그것도 비탄의 일인칭으로 증명한 순간.

그 영향은 다음 십 년 동안 퍼져나갔다. 드레이크, 키드 커디, 트래비스 스콧, 더 위켄드. 우울증을 일인칭으로 노래하는 2010년대의 거의 모든 메이저 흑인 남성 솔로 작가들이 808s의 후예였다. 그것은 단순한 사운드 디자인의 영향이 아니라 정서적 허가의 영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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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예의 2000년대가 남긴 것은 해답이 아니었다. 질문의 반복이었다. 흑인 청년이 백인 자본주의 안에서 성공하면서도 그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가. 갱스터 코드를 거부하면서도 흑인 남성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자기 자아를 신화화하면서도 그 신화에 파묻히지 않을 수 있는가.

네 번의 시도가 모두 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이 작업들이 시대를 증거한 방식이었다. 2000년대 미국은 그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 채 다음 십 년으로 넘어갔다. 칸예의 자아 신화도 그 미해결 상태 위에서 계속 팽창했고, 결국 자기 신화의 무게가 자기 정치를 결정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2018년의 MAGA 모자는 2005년의 부시 발언과 동일한 충동의 다른 외형이었다. 제도와의 불화를 연료로 삼는 자아가, 불화의 대상을 바꿈으로써 같은 자세를 정반대 기호로 번역한 것. 작가는 변하지 않았으나 적이 바뀌면서 같은 몸짓이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그 미해결을 해결하지 못한다. 칸예의 음악을 들으면서 칸예의 정치를 혐오하고, 둘을 깔끔하게 분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가 저질렀던 것과 같은 종류의 자기기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