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비평

알라니스 모리셋에게 — Alanis Morissette

「Jagged Little Pill」 · Alanis Morissette · Maverick Records · 1995 · 스트리밍 ↗

Jagged Little Pill - Alanis Morissette 음반 표지
Alanis Morissette — 「Jagged Little Pill」 (1995) 표지 © iTunes / 레이블

당신의 분노는 유통기한이 지났다. 적어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했다. 1995년 ‘Jagged Little Pill’이 전 세계를 휩쓸고 3천만 장 이상 팔리던 시절, 평론가들은 당신을 ‘일회용 분노’라 조롱했다. 21세 여성의 날것 같은 감정이 그토록 거대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자 그들은 불편해했다. 너무 솔직하다고, 너무 직설적이라고, 예술적 절제가 부족하다고. 그러나 삼십 년이 지난 지금, 당신이 예언자였음이 드러난다.

《롤링 스톤》의 알렉 포지는 이 앨범을 두고 “예의 바르게 고통받으라는 말을 들어온 젊은 여성 세대에게 직접 말을 거는 음반”이라 썼다. 정확한 진단이다. ‘You Oughta Know’에서 당신의 목소리가 야수처럼 갈라지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이별곡이 아니라 하나의 엑소시즘이었다. “그 여자랑 잘 때도 나 생각해?”라는 가사가 라디오 전파를 탔을 때 미국 중산층 가정의 거실은 얼어붙었다. 여성이 성적 배신에 대해 이토록 구체적으로, 이토록 가감 없이 말하는 것을 그들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지의 시대였다. 커트 코베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펄 잼과 사운드가든의 남성적 고뇌가 록의 언어를 지배하던 때다. 남자들의 분노는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것으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여자의 분노는 달랐다. 히스테리, 감정적 과잉, 통제력 상실. 당신이 마이크 앞에서 비명을 지를 때 업계는 당신을 ‘분노한 여성 로커’라는 좁은 범주에 가두려 했다. 토리 에이모스나 PJ 하비와 비교하며 예술적 깊이가 부족하다고 했다. 그러나 당신은 추상이나 신화에 관심이 없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구체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글렌 발라드의 프로듀싱은 당신의 고백을 번쩍이는 기타와 추진력 있는 리듬으로 감쌌다. ‘Hand in My Pocket’은 모순 속에서 지혜를 찾았다. “나는 빈털터리지만 행복해, 가난하지만 친절해.” ‘Ironic’은 아이러니의 정의를 틀리게 쓴다는 조롱을 받았지만 그 멜로디는 한번 들으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비평가들은 앨범 중반부가 처진다고, 공식이 반복된다고 지적했다. 조용한 벌스, 폭발하는 코러스, 전력 질주하는 감정. 그러나 그 예측 가능함이야말로 당신의 전략이었다. 분노는 은밀할 필요가 없다. 분노는 반복되어야 한다. 들릴 때까지.

憤怒(분노). 이 단어의 무게를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분노는 어떻게 다뤄져 왔는가. 2016년 강남역, 2018년 미투 운동,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는 투쟁. 당신의 앨범이 발매된 1995년, 한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전직 대통령들이 법정에 섰다. 여성의 분노가 공론장에서 정당한 언어로 인정받기까지는 아직 이십 년이 더 필요했다. 당신이 “나는 당신의 의사가 아니야”라고 선언하던 ‘Not the Doctor’의 경계 긋기가 한국 여성들에게 번역되기까지는 세대가 바뀌어야 했다.

그러나 번역은 결국 이루어졌다. 2019년 브로드웨이에서 당신의 앨범이 뮤지컬로 재탄생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주크박스 뮤지컬이 아니었다. 오피오이드 중독, 성폭력, 성 정체성의 혼란을 다루는 작품이었다. 삼십 년 전 개인적 고백으로 시작된 노래들이 구조적 문제를 말하는 언어가 되었다. ‘You Learn’의 가사를 다시 읽는다. “삼켜야 배우고, 넘어져야 배우고, 피 흘려야 배운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이것은 생존 매뉴얼이다.

앨범의 제목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선언이다. ‘삼키기 힘든 쓴 알약.’ 여성의 경험은 달콤하게 포장될 수 없다는 선언. 그러나 자본주의는 무엇이든 삼킨다. 당신의 분노조차 상품이 되었고, ‘You Oughta Know’는 실연당한 모든 이의 찬가가 되었다. 이 아이러니를 당신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체제는 저항마저 흡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노래했다. 흡수되더라도 일단 터뜨리는 것이 먼저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NME》의 존 멀비는 당신의 앨범을 두고 “올해 가장 감정적으로 정직한 록 음반”이라 평했다. 그러나 정직함은 종종 오해받는다. 정직함은 세련되지 못한 것으로, 절제력의 부재로, 심지어 품위 없음으로 치부된다. 당신은 그 모든 비난을 받았고, 그럼에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Mary Jane’에서 상처받은 친구에게 공감을 보내고, ‘Head Over Feet’에서 사랑에 빠진 자신을 취약하게 드러내면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는다. 언제 마지막으로 당신의 분노를 예의 없이 표현했는가. 언제 마지막으로 “그건 네 잘못이야”라고 이름을 불러가며 말했는가. 우리는 모두 예의 바르게 고통받으라는 교육을 받았다. 회사에서, 가정에서, 관계에서. 그러나 알라니스 모리셋은 삼십 년 전에 이미 알려주었다. 삼키기 힘든 알약이 결국은 치료제라고.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라고. 예의 바른 침묵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고.

당신의 분노는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