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형의 방에서 처음 이 앨범을 들었을 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갈릴레오” 파트가 시작되자 형은 눈을 감고 손을 흔들었고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무엇이 슬프다는 건지, 무엇이 우습다는 건지, 도대체 이 노래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6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중학생에게 영겁 같았다.
《롤링스톤》의 데이브 마시는 이 앨범을 두고 “록의 진화인지 퇴폐인지는 당신의 과잉에 대한 내성에 달렸다”고 썼다. 정확한 진단이다. 1975년 퀸이 내놓은 네 번째 앨범 ‘오페라의 밤’은 팝 음악사에서 ‘과잉’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재정의한 작품이다. 당대 가장 비용이 많이 든 앨범, 일부 곡에서 180번 이상의 보컬 오버더빙, 4개월에 걸친 녹음. 절제라는 개념이 사전에서 삭제된 듯한 앨범이다.
그런데 이 과잉은 단순한 자기과시가 아니다. 1975년 영국을 떠올려보라. 오일쇼크의 여파, 치솟는 실업률, 끝나지 않는 파업, 국제통화기금의 문턱까지 몰린 경제. 대영제국의 황혼이 완연한 시절이었다. 그 폐허 위에서 네 명의 젊은이가 바그너와 보드빌을 뒤섞은 거대한 사운드의 대성당을 쌓아올렸다. 이것은 현실 도피인가, 현실에 대한 조롱인가.
보헤미안 랩소디는 통상적인 팝송의 문법을 완전히 무시한다. 발라드로 시작해 모의 오페라로 치닫다가 헤비메탈로 폭발한 뒤 다시 조용히 가라앉는다. 규칙이 없다. 아니, 규칙을 박살내는 것 자체가 규칙이다. 프레디 머큐리는 이 노래를 “모의 오페라”라고 불렀지만 그 말은 이 곡의 감정적 파괴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웃기면서 슬프고, 거창하면서 허무하다. 모순들이 공존한다.
앨범의 첫 곡 ‘두 다리 위의 죽음’은 밴드의 전 매니지먼트를 향한 신랄한 저주다.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가 날을 세우고 머큐리의 목소리가 독설을 쏟아낸다. 착취당했던 자들의 복수. 그 분노가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에너지가 된다. 지배당하지 않겠다는 의지, 어떤 공식에도 맞춰주지 않겠다는 선언. 팝 음악에서 이런 오만함은 드물다. 대개 시장의 논리가, 레이블의 요구가, 라디오의 포맷이 예술가를 길들인다. 퀸은 그 모든 것에 중지를 들어올렸다.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 작업은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 그는 기타를 오케스트라처럼 다룬다. 층층이 쌓인 하모니, 합창처럼 울리는 기타 사운드. 이후 수많은 밴드가 모방을 시도했지만 아무도 똑같이 해내지 못했다. 기술적 숙련도로만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절박함이랄까. 아무도 해본 적 없는 것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
이 앨범이 발표된 지 오십 년이 지났다. 그사이 록 음악은 펑크에 의해 해체되었고, 뉴웨이브가 왔다가 갔고, 그런지가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보헤미안 랩소디는 여전히 노래방 인기 차트에 올라 있고, 스포츠 경기장에서 울려 퍼지며, 새로운 세대가 계속해서 발견한다. 과잉은 살아남았다.
당신은 어떤 음악을 듣는가.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3분짜리 곡들의 연속인가. 귀에 거슬리지 않고 뇌에 부담을 주지 않는 무해한 사운드인가. 때로는 과잉이 필요하다. 규칙을 어기는 용기가, 웃음거리가 될 각오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야심이 필요하다. 퀸의 이 앨범을 다시 들어보라. 끝까지. 그리고 당신 안의 과잉을 해방시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