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의 질문
생존이란 무엇인가. 변화인가, 고수인가. 1977년 런던의 공기는 침을 뱉는 냄새로 가득했다. 섹스 피스톨스가 “미래는 없다”고 외칠 때, 화려한 코르셋을 입은 공룡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굴복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퀸은 세 번째 길을 택했다. 《News of the World》의 앨범 커버에서 거대한 로봇이 밴드 멤버들을 집어삼키는 그림은 자학(自虐)처럼 보이지만, 실은 선전포고였다.
발로 찍는 혁명
〈We Will Rock You〉는 음악인가. 악기가 없다. 기타도 없고 드럼도 없다.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친다. 쿵-쿵-짝. 이것이 전부다. 브라이언 메이는 이 원시적 박동 위에 기타 솔로 하나를 얹었을 뿐인데, 그 순간 경기장 전체가 하나의 심장이 된다. 《멜로디 메이커》의 크리스 웰치는 이를 “본질로 정제된 스타디움 록”이라 불렀다. 틀린 말이 아니다. 다만 그는 한 가지를 빠뜨렸다. 이 노래가 누구의 것이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퀸이 만들었으나 퀸의 소유가 아닌 노래. 축구장에서, 농구 코트에서, 시위 현장에서 수십억 인류의 발이 이 리듬을 밟았다. 저작권료는 밴드에게 돌아갔겠지만, 노래의 영혼은 군중에게 넘어갔다. 이것이 대중음악의 역설이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되고, 가장 보편적인 것이 창작자의 손을 떠난다. 퀸은 그 역설을 의도했는가, 아니면 우연히 발견했는가.
챔피언의 자격
〈We Are the Champions〉가 뒤따른다.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가 “난 내 몫을 치렀다”고 선언할 때, 그것은 단순한 승리의 노래가 아니다. 패배를 전제한 승리, 굴욕을 기억하는 영광. “모래를 얼굴에 맞았지만 일어섰다”는 가사는 1977년 펑크의 조롱을 맞고 선 퀸 자신의 초상이기도 했다. 공로(功勞)와 치욕(恥辱)이 한 몸에 공존하는 순간.
그러나 이 노래 역시 창작자를 배반했다. 스포츠 경기장의 승리 테마가 되면서 노래는 맥락을 잃었다. 고통의 서사는 탈색되고 환호만 남았다. 퀸이 원했던 것이 이것이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중문화란 원래 그런 것이다. 작가의 의도(意圖)는 수용의 바다에서 표류하다 익사한다.
공룡의 이빨
앨범의 나머지를 듣는다면 퀸이 단순히 굴복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로저 테일러의 〈Sheer Heart Attack〉은 펑크보다 빠르고 거칠다. 2분짜리 분노의 질주. 펑크에게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증명하는 곡이다. 〈Get Down, Make Love〉는 어둡고 불쾌한 사운드스케이프를 펼치며 펑크의 허무주의를 다른 방식으로 흡수한다. 존 디콘의 〈Spread Your Wings〉는 여전히 선율의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적응하되 항복하지 않는다.
묻는다, 당신에게
결국 퀸은 살아남았고 펑크는 스스로를 집어삼켰다. 1977년 “공룡”이라 조롱받던 밴드는 1985년 라이브 에이드에서 지구 전체를 경기장으로 만들었다. 〈We Will Rock You〉의 박동이 웸블리를 뒤흔들 때, 누가 승자인지는 명확해졌다.
그러나 승리가 정당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당신은 묻고 있는가. 경기장을 채우는 그 함성이 진정 당신의 목소리인지. 누군가 만들어준 리듬에 발을 맞추며 “우리가 챔피언”이라 외칠 때, 그 ‘우리’는 대체 누구인지. 대중음악의 가장 위대한 순간은 언제나 그 질문을 품고 있다. 발을 구르기 전에, 한 번쯤 멈춰 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