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나는 이번에도 속았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 루퍼트 와이엇 (Rupert Wyatt) · 2011
팀 버튼판 <혹성탈출>이 화형당한 뒤, 이 시리즈는 무덤에 묻혔다고 모두 말했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영국의 한 신문이 최근 이 속편에 대해 “후속편 없이는 못 사는 시대에, 이 영화는 속편이 존재할 이유를 증명한다”라고 썼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바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라고. 그리고 나는 또 속았다.
이 영화의 속임수는 단순하다. 처음 40분은 블록버스터답지 않게 조용하다. 과학자 윌 로드먼이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살리려고 유전자 치료제 ALZ-112를 만들고, 그 부산물에서 영장류의 지능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이 설정은 SF라는 장르가 늘 해온 일의 반복이다. 과학이 생명을 통제하고, 통제는 어긋난다. 그러나 루퍼트 와이엇의 진짜 목적은 설정이 아니라 눈빛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시저가 유리창 너머로 커가는 세상을 응시한다. 그 시선을 안디 서키스가 빚어낸 모션캡처 얼굴에 담는 순간, 영화는 더 이상 실험 성공담이 아니게 된다.
서키스는 이 영화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연기를 보여준다. 디지털 가면 뒤에서도 들썩이는 눈동자, 망설이다가 앙다문 턱, 폭력의 임계점에서 딛는 발끝. 이 모든 것이 화면 깊숙한 곳에 머물러 있는 내면이라는 걸 밝힌다. 한 미국의 업계지는 이 연기를 두고 아카데미가 이 문법을 아직도 외면한다고 불평했는데, 그 말은 옳다. 프랑코의 윌, 리스고의 아버지, 프리다 핀토의 조력자는 대체로 그만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감정의 무게는 오히려 시저가 혼자 감당한다. 그 불균형이 이 영화의 뼈대다.
유리벽 너머의 얼굴
중반, 시저가 영장류 보호소에 갇히면서 영화는 갑자기 교도소 드라마로 변한다. 그곳에서 시저는 자기 앞에 놓인 문과 창살이 전적으로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질서라는 걸 알아버린다. 계단을 격리하는 것이 권력이고, 먹이를 나누는 것이 통제라는 걸 눈으로 읽는다. 그리고 그는 다른 침팬지들에게 그 사실을 가르친다. 와이엇은 두 번째 장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공간 지형을 앞세운다. 보호소의 격리 벽, 창살, 유리창은 모두 의도된 배치다. 카메라가 시저의 시선과 나란히 움직일 때, 우리는 비로소 동물원 구경꾼이 아니라 갇힌 쪽에 서 있다.
이 장면들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는 시저가 폭력을 배우는 과정을 영화가 파시스트의 탄생처럼 찍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를 응원하고 있다. 이 모순이 이 영화의 전부다. 골든게이트 브릿지 위의 전투는 해방의 서사라기보다 비용의 서사다. 시저가 처음으로 말을 꺼낸다. 그 단어는 한마디의 거부다. 총구 앞에서, 목줄 앞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던진다. 이 한 방이 나오기까지 영화는 90분 내내 벼른다. 그 인내는 여름 극장에서 보기 드문 결말에 정직성을 부여한다. 남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우리가 감시자였다는 불편함이다.
어쨌든 이 영화는 속편의 무덤을 다시 팠고, 우리는 그 무덤 앞에서 박수를 친다. 시저가 저 너머에서 던진 한 단어가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면, 이 역설은 결국 나의 것이다. 실패가 곧 성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