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불가능한 것들: 70세의 첫 발걸음

「불가능한 것들」 (Cosas imposibles) · 에르네스토 콘트레라스 (Ernesto Contreras) · 2021

불가능한 것들 (2021) 이미지
「불가능한 것들」 (2021) 이미지 © TMDb

기억 속의 할머니

어릴 적 외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느꼈다. 외할아버지가 계실 때와 안 계실 때, 할머니의 목소리 크기가 달랐다. 식사 중에도 할머니는 가만히 앉아 숟가락만 들었다 놓았다 하셨고, 할아버지가 외출하시면 그제야 TV 채널을 돌리셨다. 나는 당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할머니의 침묵은 평화가 아니었다. 생존이었다.

에르네스토 콘트레라스 감독의 멕시코 영화 ‘불가능한 것들’을 보면서 그 기억이 떠올랐다. 영화 속 마틸데는 수십 년을 학대하는 남편 곁에서 버텨왔다. 영화가 시작되면 그 남편은 이미 죽어 있다. 콘트레라스는 이 죽음에 슬픔의 음악도, 느린 화면도 붙이지 않는다. 마틸데의 얼굴에 비치는 것은 애도가 아니다. 마치 오랜 전쟁이 끝난 뒤의 정적처럼, 조심스럽지만 확실한 안도가 있을 뿐이다.

작아지는 법을 배운 여자

칠순을 넘긴 마틸데를 연기한 노라 벨라스케스는 손끝 하나, 시선 하나로 수십 년의 억압을 보여준다. 그녀가 방 안을 걸을 때 어깨가 약간 움츠러든다. 말을 하기 전 미세하게 주저한다. 자기 집인데도 마치 손님처럼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영화 《버라이어티》의 피터 드브루지가 “자신을 줄이며 생존해온 여자”라고 표현한 대목이 정확하다. 마틸데는 작아지는 법을 익혀온 사람이다.

이 영화가 뛰어난 지점은 그 작아짐의 반대편, 즉 펼쳐짐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콘트레라스는 그녀의 변화를 거창한 선언이나 눈물의 고백으로 그리지 않는다. 마틸데가 처음으로 혼자 TV 리모컨을 쥔다.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원하는 음식을 만든다. 이웃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소소하고 사소한, 그러나 그녀에게는 불가능했던 것들이다.

기이한 우정의 발명

영화의 또 다른 축은 젊은 이웃 미겔이다. 칠레 출신 뮤지션 베토 쿠에바스가 연기하는 이 청년은 자신의 방향을 잃어버린 상태다. 그도 상처를 안고 있다. 마틸데와 미겔, 이 둘의 우정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로맨스도 아니고, 모자 관계도 아니며, 단순한 이웃 정도 넘어선다. 둘은 서로의 거울이면서 서로의 창문이다.

콘트레라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억지스러운 감동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고백하지만, 그 고백이 즉각적인 치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마틸데는 여전히 주저하고, 미겔은 여전히 헤맨다. 그럼에도 둘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는 묘하게 공기가 달라진다. 분위기가 나긋해지고, 색감이 따뜻해진다. 촬영감독 토나티우 마르티네스는 이 변화를 미묘하게 포착한다. 마틸데의 집이 조금씩 밝아지고, 그녀의 얼굴에 빛이 더 많이 머문다.

희극과 비극의 묘한 동거(同居)

이 영화는 원래 무대 위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연극적 기원은 때때로 드러난다. 대화가 약간 극적이고, 공간의 활용이 연극 무대처럼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콘트레라스는 이 연극적 밀도를 영화로 옮기면서 지혜롭게 조절한다. 카메라는 인물들의 얼굴에 오래 머문다. 그 얼굴들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한다.

영화에는 웃음이 있다. 마틸데가 자신의 새로운 과부 신세를 담담하게 묘사하는 장면들에서 관객은 웃는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무언가 서글픈 것이 있다. 《할리우드 리포터》의 셰리 린든이 지적한 대로, 이 영화는 “무겁지 않되 무게를 잃지 않는” 줄타기를 한다. 희극과 비극이 동거한다. 어쩌면 삶이 원래 그런 것일 테다.

늦어도 괜찮다는 말

‘불가능한 것들’이라는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70이 넘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 세대를 넘어 진정한 우정을 맺는 것, 억눌러왔던 자아를 마침내 펼치는 것. 영화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단, 그것이 쉽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가능하다고만 말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틸데의 표정은 평온하다. 그녀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과거가 사라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자기 집에서 자기 목소리로 말할 수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끝내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지 못하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분의 삶에는 리모컨을 마음대로 쥐는 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아팠다. 동시에 위로가 됐다. 적어도 스크린 위에서는, 마틸데가 그 불가능한 것들을 해냈으니까.

물론 이건 내가 영화에 개인적 감상을 과하게 투영한 결과일 수 있다. 평론가로서 객관성을 잃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영화가 필요하다. 분석하기보다 그냥 마음이 가는 영화 말이다. 이 글도 그래서 체계가 없다. 나는 나름의 프레임을 갖추려 했지만, 결국 마틸데의 얼굴만 떠올리다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