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타국어로 쓴 고향의 물결 — 압록강은 흐른다

「압록강은 흐른다」 (Der Yalu fließt (The Yalu Flows)) · 이미륵 (Mirok Li) · 옮긴이 안삼환 · 민음사 · 1946

압록강은 흐른다 표지
「압록강은 흐른다」 (1946) 표지 © Open Library / 출판사

어린 시절 나는 조부의 서재에서 먹 가는 소리를 들으며 잠든 적이 있다. 벼루 위로 먹이 천천히 풀리는 그 둔탁하고 습한 소리가 꿈속까지 따라와 일종의 자장가가 되었다. 그 기억이 아직 어딘가에 박혀 있다는 사실을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펼치며 깨달았다.

1946년 뮌헨에서 출간된 이 자전적 소설은 기묘한 이중 망명의 기록이다. 조선을 떠난 육신(肉身)의 망명과 모국어를 버린 언어의 망명. 영국의 『타임스 문학 부록』은 이 작품을 “유화가 아닌 수채화의 정밀함”에 비유한 바 있거니와, 정작 놀라운 것은 그 수채화를 그린 붓이 독일어였다는 사실이다. 조부에게서 한문을 배운 손자가 훗날 압록강 마을의 계절과 제례를 독일어 문장으로 복원한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책의 전반부는 목가적이다. 유년기의 의례와 농경의 순환, 어른들 사이에 흐르는 예(禮)의 문법이 느린 물살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후반부로 가면 풍경이 바뀐다. 의학도 이미륵은 1919년 만세 시위에 뛰어들고, 결국 만주·상하이·뮌헨으로 이어지는 역순례의 길을 떠난다. 『가디언』은 이 행로를 “정체성의 원천으로부터 멀어지는 매 걸음”이라 묘사했는데, 정확하다. 다만 그 걸음이 비탄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의 묘한 미덕이다. 분노도 자기연민도 없이, 이미륵은 사라진 세계를 담담히 직조한다.

나는 이 절제가 유교나 불교의 산물이라는 해석에 절반만 동의한다. 오히려 타국어라는 거리두기가 감정의 과잉을 차단한 것은 아닐까. 모국어로 썼다면 격앙되었을 문장이, 독일어라는 냉정한 그릇 안에서 비로소 고요해진 것이다.

역설이 남는다. 고향을 영영 잃은 자만이 고향을 가장 정밀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