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경기장의 침묵, 호텔방의 언어 — 히티드 라이벌리
「히티드 라이벌리」 (Heated Rivalry) · 레이철 리드 (Rachel Reid) · 옮긴이 우진하 · 카리나 프레스 (Carina Press, 원서) · 2019
1
NHL 드래프트 무대. 순위 발표를 기다리는 두 소년이 있다. 한 명은 캐나다 출신의 금발 모범생, 다른 한 명은 러시아에서 건너온 비웃음 띤 입술의 소년. 1순위와 2순위. 그들은 악수를 나눈다. 카메라 앞에서다. 레이철 리드의 ‘히티드 라이벌리’는 이 장면 이후 7년을 그린다. 7년간 두 남자는 빙판 위에서 부딪치고, 인터뷰에서 서로를 깎아내리고, 미디어의 라이벌 서사에 완벽히 부응한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이 진짜 말을 나누는 곳은 경기장이 아니다. 원정 경기가 끝난 뒤의 호텔 방, 아무도 모르는 전화번호로 찍어 보내는 짧은 메시지, 공항 라운지 한구석에서 시선이 스치는 0.5초. 라이벌이란 단어의 어원은 ‘같은 강물을 공유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두 남자가 공유하는 건 무엇인가. 경쟁심인가, 욕망인가, 아니면 둘 모두를 영원히 숨겨야 하는 공포인가.
2
《가디언》은 이 소설을 두고 로맨스 장르가 조용히 겪고 있는 혁명의 사례라 썼다. 과장이 아니다. 셰인 홀랜더와 일리야 로자노프의 관계는 장르 로맨스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그 문법이 회피해온 질문들을 정면으로 끌어안는다. 프로 스포츠의 과잉 남성성, 클로짓 생활자의 만성적 경계심,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어야 살아남는 선수의 이중생활. 리드는 이 모든 것을 ‘적대적 훅업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는’ 공식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공식에 복종한 게 아니라 공식을 이용했다. 에피소드 구조는 두 남자의 관계가 직선이 아닌 점선으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만남과 만남 사이에 수개월이 흐르고, 그 공백 동안 셰인은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웃고, 일리야는 기자들 앞에서 건방진 러시아인 역할을 수행한다. 리드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의 무게를 더 정교하게 다룬다. 그래서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사랑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기다림,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어떤 자기 자신을 연기해야 하는가라는 물음.
M/M 로맨스에서 섹슈얼 텐션은 필수다. 리드 역시 그 요구를 충족한다. 하지만 그보다 오래 남는 건 ‘섹스 이후’의 장면들이다. 호텔 침대에서 서로의 등을 향해 누운 채 대화하는 두 남자. 다음 시즌 FA 계약 이야기, 어릴 때 쓰던 장갑 이야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 리드는 친밀함이 육체적 접촉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로맨스 소설을 자주 읽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소설의 ‘등 맞댄 대화’ 장면은 기억에 오래 남았다.
3
몇 해 전, NFL 최초의 커밍아웃 현역 선수 칼 나시브가 은퇴했다. 2021년 커밍아웃 이후 현역으로 버틴 건 고작 두 시즌 남짓이다. 한국 스포츠계에선 아직 그 ‘최초’가 나오지 않았다. 경기장은 여전히 어떤 사람들에게 침묵을 요구한다. 리드의 소설이 판타지라면, 그 판타지는 ‘커밍아웃해도 커리어가 끝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한다는 점에 있다. 진짜 판타지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사랑을 말해도 계약이 해지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로맨스인 동시에 노동 소설이다. 자기 자신 전부를 팔아야 먹고사는 직업의 비극에 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