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여든네 번 빈손, 그러나 바다가 남긴 것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 ·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 옮긴이 김욱동 · 민음사 · 1952

멕시코 만류의 푸른 물결 위, 노인은 허리를 굽힌 채 줄을 어깨에 걸고 있다. 사흘째 버티는 손바닥은 줄에 베여 피가 배어 나오고, 등줄기는 낚싯줄의 무게에 눌려 제대로 펴지도 못한다. 노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고기야, 나는 너와 함께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그가 마침내 끌어올린 것은 5미터가 넘는 청새치 한 마리였다. 그러나 그 은빛 살점을 상어 떼가 뜯어먹는 데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노인과 바다』는 이렇게, 승리의 순간과 상실의 순간을 거의 동시에 보여준다.

노인은 왜 바다로 나가는가

산티아고는 여든네 번 연속으로 고기를 잡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운 없는 노인이라 부르고, 함께 타던 소년 마놀린조차 부모의 명으로 다른 배에 오른다. 그런데도 노인은 여든다섯 번째 날 다시 돛을 올린다. 여기서 이 소설은 단순한 불운의 기록이 아니라 직업의 윤리를 다룬 이야기로 바뀐다.

미국의 한 평론가는 이 작품을 두고 “동작이 아니라 품위에 힘이 있다”고 평한 바 있다. 산티아고가 거대한 청새치를 사흘에 걸쳐 상대하는 동안, 그는 물고기를 적이 아니라 형제라고 부른다. “나는 이 물고기가 무척 좋다. 하지만 나는 이 물고기를 죽여야 한다.” 이 대사는 살아남기 위한 포식 행위를 넘어, 자기 일을 정확하게 끝내려는 장인(匠人)의 태도에 가깝다. 그는 물고기의 힘을 존중하고, 바다의 흐름을 읽고, 자신의 몸이 한계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낚싯줄을 놓지 않는다. 그것은 단련(鍛鍊)과 인내(忍耐)가 한 몸에 붙어 있는 상태다.

헤밍웨이는 이 장면을 짧고 마른 문장으로 눌러 쓴다. 형용사는 거의 쓰지 않고, 구체적인 사물의 이름만 남긴다. 커피, 미끼, 물고기의 비늘, 상어의 턱, 노인의 피 묻은 손. 그 절제 덕분에 이야기는 구호가 되지 않고 우화로 남는다. 노인이 마지막에 뼈만 남은 청새치를 배에 묶고 돌아오는 장면은 그래서 비참하기보다 차분하다.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는, 노인이 스스로 내뱉는 문장이 이 소설의 척추라면, 그 문장은 허공에서 떨어진 교훈이 아니라 사흘간의 몸부림 끝에 도달한 결론처럼 들린다.

소년이 울어야 우화는 완성된다

이 이야기를 감동으로 밀어 올리는 인물은 산티아고가 아니라 마놀린이다. 소년은 노인이 잠든 뒤 상처 난 손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는 노인이 잡은 물고기가 상어에게 뜯긴 사실보다, 그가 혼자 그 싸움을 치렀다는 사실 앞에서 운다. 노인의 규율은 이렇게 소년에게 전달된다. 마놀린은 다음 출항을 준비하며 말한다. “이제 나는 당신과 함께 나가겠어요.” 낡은 기술과 고집은 그렇게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1952년에 발표된 이 중편은, 지금 읽으면 고령의 노동자가 홀로 감당해야 하는 무게에 대한 이야기로도 보인다. 성과가 없으면 존재가 지워지는 사회에서, 여든네 번의 빈손은 흔한 풍경이다. 하지만 산티아고는 불운을 탓하는 대신 다시 바다로 나간다. 잡아 올린 성과는 상어가 가져가도, 그가 쌓은 태도는 빼앗기지 않는다.

오늘날의 많은 싸움도 그렇다. 열심히 일해도 결과는 남의 몫이 되고, 정직하게 버텨도 남는 것은 뼈대뿐인 날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상어 떼를 원망하기보다, 다시 줄을 던질 수 있는지를 묻게 된다. 빈손으로 돌아온 노인이 다음 날 아침 또 다른 출항을 준비하는 장면은, 그래서 오래된 문학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위로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