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도둑이다.
비틀즈의 멜로디를 훔쳤고, 스톤 로지스의 허세를 훔쳤고, 더 후의 기타 톤을 훔쳤다. 《NME》의 존 해리스가 1994년 이 앨범을 두고 “익숙한 것들을 순전한 확신으로 전달한다”고 썼을 때, 그것은 칭찬이 아니라 진단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절도 행위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효한가. 훔친 자가 원본을 압도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답은 간단하다. 당신들에게는 잃을 것이 없었다.
1994년, 대서양 건너에서는 커트 코베인이 자기혐오(自己嫌惡)의 끝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시애틀의 그런지는 중산층 백인 청년의 우울을 대변했고, 그 우울은 곧 패배주의로 굳어갔다. 같은 해 맨체스터 번사이드 거리의 실업 급여 수급자 형제는 정반대의 선언을 내놓았다. “Tonight I’m a rock ‘n’ roll star.” 이것은 망상(妄想)이 아니라 계급적 생존 전략이었다. 공영주택 단지에서 태어난 자에게 허락된 탈출구란 축구 아니면 기타뿐이다. 겸손은 사치고, 자기의심은 죽음이다.
〈Live Forever〉를 들어보라. “Maybe I just wanna fly.” 어쩌면 그냥 날고 싶을 뿐이라는 이 한 줄이, 코베인의 “I hate myself and want to die”에 대한 정면 반박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허나 이것을 단순한 낙관으로 읽는 자는 바보다. 저 ‘어쩌면’이라는 단어가 품은 것은 확신이 아니라 절박함이다. 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되뇌는 자는, 지금 땅에 처박혀 있는 자다.
《Definitely Maybe》. 제목부터가 모순이다. 분명히, 아마도. 확신과 유보(留保)의 기이한 동거. 이 모순이야말로 1990년대 영국 노동계급 청년의 정신 상태 그 자체 아니었던가. 대처가 탄광을 폐쇄하고 공장을 닫은 뒤, 부모 세대의 꿈은 증발했다. 그러나 그 자식들은 꿈을 포기하는 대신 꿈의 볼륨을 높였다. 오웬 모리스가 쌓아 올린 기타 벽은 그래서 그토록 폭력적이다. 저것은 음향이 아니라 계급의 포효다.
〈Slide Away〉의 7분은 고백에서 시작해 폭발로 끝난다. 리암, 당신 형의 곡을 당신이 부를 때, 그 코맹맹이 비음은 존 레넌의 복제가 아니라 레넌이 감히 닿지 못한 영역으로 진입한다. 레넌은 리버풀 중산층이었다. 당신들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결국, 당신들이 훔친 것은 음표가 아니라 자격이다. 비틀즈가 될 자격, 스타가 될 자격, 꿈꿀 자격. 원래 그것은 당신들 몫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신들은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문을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물론 나 같은 자가 계급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서울 강남의 난방 잘 되는 서재에서 맨체스터 빈민가를 논하는 꼴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