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비평

그런지의 배신자들 — Pearl Jam

「Ten」 · Pearl Jam · Epic Records · 1991 · 스트리밍 ↗

Ten - Pearl Jam 음반 표지
Pearl Jam — 「Ten」 (1991) 표지 © iTunes / 레이블

펄 잼의 《Ten》은 그런지가 아니다.

1991년 시애틀에서 터져 나온 이 앨범을 두고 많은 이들이 너바나와 한데 묶어 ‘그런지의 쌍두마차’라 불렀지만, 그것은 지리적 인접성에 기댄 오류다. 《NME》의 키스 캐머론은 정확히 집었다. 커트 코베인이 냉소적 거리두기를 택할 때, 에디 베더는 정면충돌을 선택했다고. 이 차이는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관의 차이요, 결국은 누구의 편에 서느냐의 문제다.

《Ten》의 탄생 신화(神話)는 비극에서 시작된다. 마더 러브 본의 앤드루 우드가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스물넷에 죽었다. 기타리스트 스톤 고사드와 베이시스트 제프 아멘트는 남겨진 자들이었다. 샌디에이고의 서퍼 에디 베더에게 데모 테이프가 건너갔고, 그는 파도를 타며 가사를 썼다. 시애틀로 날아온 이 청년이 마이크를 잡자 밴드는 죽은 동료의 유령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엇이 되었다.

1991년은 승리의 해였다. 소련이 무너졌고, 걸프전은 100시간 만에 끝났으며,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이 거대한 승전 서사 아래서 ‘제러미’의 소년은 교실 앞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청소년 소외와 가정폭력, 학교 시스템의 붕괴를 이 노래만큼 처참하게 그려낸 곡이 그 시대에 또 있었던가. 베더는 영화적 디테일로 이 참극을 조명한다. 나는 이것이 레이건-부시 시대가 남긴 폐허(廢墟)에 대한 음악적 증언이라고 본다. 복지 해체와 가족 해체, 총기 규제 실패가 만들어낸 세대의 초상.

‘얼라이브’는 더욱 교묘하다. 후렴구의 “I’m still alive”는 승리의 함성처럼 들리지만, 가사를 읽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고백, 어머니와의 뒤틀린 관계. 이 곡은 살아남음이 아니라 살아남아버림의 고통을 노래한다. 관객이 주먹을 쥐고 따라 부를 때 그들은 무엇을 축하하고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어쩌면 베더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평가들은 릭 파라샤의 프로덕션이 너무 깔끔하다고 불평했다. 그런지의 순수주의자들에게 이 윤기는 변절의 증거였을 테다. 《Ten》은 아레나를 향해 설계되었고, 그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레드 제플린과 더 후의 그림자가 마이크 맥크리디의 기타 솔로 위로 어른거린다. 여기서 나는 스스로 묻는다—언더그라운드의 윤리와 대중에 대한 접근성은 반드시 배타적인 관계인가?

‘블랙’은 이 앨범에서 가장 사적이면서 가장 보편적인 순간이다. 떠나간 연인에 대한 이 발라드는 멜로드라마에 빠지지 않는다. 베더의 목소리는 상처의 깊이만큼 낮게 가라앉다가, 끝에 가서 찢어진다. 1990년대 록 발라드 중 이 곡을 넘어서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물론 나의 무지일 수도 있다.

《Ten》이 발매된 지 서른세 해가 지났다. 펄 잼은 여전히 투어를 돌고, 베더는 여전히 무대에서 목이 터지라 노래한다. 그들은 그런지의 상업적 타락을 증명한 것인가, 아니면 그 어떤 동시대 밴드보다 오래 살아남음으로써 음악의 진정성이란 무엇인지를 새로 정의한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승자와 배신자의 경계는 흐려진다. 아마 처음부터 그 경계 자체가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